"오늘도 버티면서 해요"
  • 이예원 인턴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03 18:33
  • 호수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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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무대 아래 걸그룹의 민낯 …데뷔 1년 3인조 걸그룹 ‘러버소울’ 동행 취재

20대 중반의 나이.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에 6년이 넘도록 무대 밑에서 묵묵히 기다려왔다. 고정적인 수입은 없고 휴식도 마음대로 갖지 못했다. 노력이 곧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건 예전부터 느꼈다. 언제 성공할지 그 누구도 확신해주지 못했다. 데뷔한 지 1년 된 3인조 걸그룹 ‘러버소울(Rubber Soul)’의 얘기다.

 

유난히 추웠던 올겨울, 1월과 2월에 걸쳐 총 세 차례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을 마주했다. 브라운관이 아닌 안무연습실에서, 유튜브 영상 속이 아닌 평범한 거리에서 바라봤다. 스물넷, 스물다섯, 그리고 스물일곱. 성장하고, 흔들리고, 다시 일어나는 그들에겐 이 시대 청춘이 마주한 차가운 현실과 가슴속 깊은 고민이 배어 있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업 다운, 업 업 다운 다운, 자 가볍게 다시 한 번!” “아, PD님! 너무 빨라서 헷갈려요.” 1월의 어느 날,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안무연습실. 민낯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세 멤버가 벽면 한쪽을 가득 차지한 대형 거울 앞에서 안무 연습을 한다. 마치 게임을 하듯 상대를 향해 손뼉을 치는 동작부터 절도 있는 마임, 그리고 현대무용 자세까지 쉴 새 없이 연습이 이어진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연습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12시가 되어서야 잠깐의 휴식이 주어진다. 멤버 라라(본명 박글라라·27)가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약을 꺼내 입안에 털어넣는다. “아 이거요? 위경련 약이에요. 제가 위가 안 좋아서요. 안무 연습할 때 위액 안 나오게 억지로 먹어줘요.”

 

중년 질환인 ‘퇴행성 관절염’에 시달리기도


러버소울의 맏언니 라라는 위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 건 무릎이다. 얼마 전에는 병원에서 입원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주로 40~50대에 발생하는 퇴행성 관절염이라고 했다. “치료한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더 심해지지 않길 바라야죠.” 다시 일어나 몸을 풀던 그는 이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이 바닥에서 몇 년 하다 보면 이 정도는 다 있어요. 그냥 직업병이라고 보면 돼요.”

 

이날 안무 수업은 오후 4시까지 이어졌다. 밥 먹을 틈도 없이 6시간 연속으로 춤만 춘 셈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같은 일정이다. 그들을 지켜보던 매니저 이주형씨가 말했다. “이 친구들은 무릎이나 허리가 많이 상해요. 워낙 연습량이 많으니까요. 걸그룹인데 따로 식단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예요.” 연습이 끝날 때쯤 안무 PD가 숙제를 내줬다. 새로 배운 동작을 연습해서 촬영해 보내라고 했다. 매일 있는 과제다. 6시간의 안무 연습으로 지치기엔 아직 할 일이 많다.

 

끊임없이 동작을 맞춰보고, 또 맞춰본다. 하루는 고되고 일주일은 빠르다.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느냐고 물었다. 라라는 “버티면서 한다”고 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버티면서 해요. 오늘 할 거 다 하고 무사히 넘어가자고 생각하죠. 이걸 못 지키면 저희끼리, 그리고 안무 PD님들과 한 약속을 저버리는 거잖아요.”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가 돼서야 그들은 첫 끼니를 해결하려고 식당으로 향했다.

 


매달 평균 세 팀 이상 걸그룹들 데뷔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Mnet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에서 101명의 소녀는 각자 부여받은 ‘등급’별로 대열을 서 “Pick me(픽 미), Pick me, Pick me up”이라 외친다.<86쪽 딸린 기사 참조> 데뷔의 기회는 대중의 선택을 받는 11명에게만 주어진다. 이들에게 데뷔는 간절한 목표이자 절박한 꿈이다.

 

러버소울에게도 그 꿈이 이뤄진 순간이 있었다. 지난해 2월13일, 그들은 이날을 잊을 수 없다. 직접 작곡·작사한 두 곡에는 그동안의 시간과 땀이 녹아 있었고, 그만큼 자신도 있었다. ‘정통 힙합 걸그룹’ ‘실력파 신예’ 등 화려한 수식어도 붙었다. 

 

그런데 대중 앞에 나타난 걸그룹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한 해 데뷔한 걸그룹만 37팀, 한 달에 평균적으로 세 그룹 이상이 등장한 셈이다. 러버소울은 활동을 그리 길게 이어나가지 못했다. 멤버 초아(본명 최초아·25)는 기대에 못 미친 아쉬운 결과의 탓을 스스로에게서 찾으려 했다. “처음에는 ‘왜 우리를 몰라주지?’라는 자괴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저희가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만 한 것 같더라고요.” 막내 예슬(본명 김예슬·24)은 데뷔한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분명 데뷔를 했는데, 그냥 똑같더라고요. 무대에 올라서 정신없이 후다닥 하고 내려왔죠.”

 

첫 방송이 아쉽기는 리더 라라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실망이 컸다. “내가 이거 하려고 이렇게 고생했나 싶었죠. 인이어 착용도 처음이고, 무대 지시나 ‘슛’ 사인도 없어서 당황했어요. 앞의 선배들 순서에 밀려 저희 같은 ‘생 초짜’는 리허설 시간이 줄어들어 대충 체크만 하고 무대에 올라야 하기도 했죠. 근데 주변에 얘기해보니, 데뷔하면 다들 그런대요. 인기가 많으면 그때부턴 점점 재밌어진대요.” 옆에서 초아가 웃으면서 거들었다. “우리가 아직 인기가 없어서 그랬나 봐.”

 

그녀들과 대화를 하던 중, 한 여성이 오디션을 보러 왔다.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큰 소리로 인사를 하더니 대표이사와 프로듀서들 앞에서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1992년생으로 올해 25세가 됐다는 그녀는 “나이가 좀 많아요”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이미 데뷔 경험이 있지만, 전 소속사와 더 이상 연락이 안 돼 새 회사를 찾는다고 했다. 걸그룹에게 데뷔는 하나의 관문이다. 그리고 그 관문에 들어서면 수십 팀, 수백 명의 경쟁자와 마주친다. 대중의 눈에 단번에 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머지는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좇아 묵묵히 그렇게 1년, 2년, 몇 년을 기다린다.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사라진다.

 

직접 자신들의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는 러버소울에게 회의는 일상이다. 왼쪽부터 예슬, 라라, 초아. ⓒ 시사저널 임준선

 


‘연습생’과 ‘알바생’의 무한 반복

 

데뷔한 지는 1년이 갓 넘었지만, 러버소울은 모두 오랜 연습생 시절을 겪었다. 예슬과 초아는 고등학생 때 시작해 5년 정도를 보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댄스팀에 들어간 라라는 대학 실용음악과에 다니다가 본격적으로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생활은 7년 동안 이어졌다. 그녀들은 모두 이전에 각자 소속했던 회사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어 공중으로 붕 떠버렸고, 2013년 가을 우연한 계기로 지금 소속사에서 한 팀이 되었다.

 

연습생은 ‘철새’다. 내게 맞는, 혹은 나를 선택해주는 회사를 찾아 떠나고 또 떠난다. 그 과정에서 회사가 망하면 순식간에 둥지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 공백에서 오는 정신적 공허감은 그동안 부지런히 달려온 시간들을 무력하게 만들곤 한다. 초아는 러버소울을 만나기 직전까지도 연습생 생활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3년 봄에 여차여차 찾은 새로운 회사가 또 무너지면서 당시엔 또 다른 곳에 갈 엄두가 안 났다고 했다. “많이 지쳤었죠. 나는 왜 이 일에만 목매고 살았을까 생각도 했고요. 무작정 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그냥 다 접고 여기에서 빵집 알바를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라라는 연습생 시절, 문득 강아지랑 있는 게 가장 행복하단 생각에 수의사를 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봤다. “춤추고 노래한 세월이 얼마예요. 8년의 시간이 이젠 지겹더라고요. 그래서 토익학원에 등록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수의사를 하려고 해도 편입하고 의사 과정 밟고 뭐 이것저것 다 하면 또 8년이 걸리는 거예요. ‘하던 거 하자’란 생각으로 다시 돌아왔죠.” 라라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털어놓았다. 당시 그녀 나이 스물넷, 대학생으로 치면 졸업반. 누구보다 고민의 깊이가 깊었을 그때의 기억도 이제는 담담하게 느껴졌다.

 

그 누구도 확신해주지 않는 데뷔라는 목표를 향해 긴 터널을 걷는 연습생은 정신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어려움도 겪는다. 연습생에게 식대조차 지원하지 않는 회사도 많고, 부모님께 언제까지 손을 벌릴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연습생 신분을 잠시 내려놓고 ‘알바생’이 되곤 한다. 연습생이 되기 전, 2년 동안 피자 체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예슬은 연습생이 된 후에도 회사를 옮길 때마다 그 공백기에 음식점·PC방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다. “트레이닝 학원에 다니거나 제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했죠. 하다못해 밥이라도 제 돈으로 사먹으려고요.” 연습생 시절 회사 다섯 군데를 옮겨 다닌 초아도 한 회사를 나올 때마다 알바를 구했다. 전남 순천에서 혼자 서울에 올라와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던 그녀는 ‘집값은 못 내도 용돈이라도 벌자’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춤과 노래가 좋았던 그녀들은 러버소울이 되기 전까지 그렇게 연습생과 알바생 생활을 반복했다.

 

걸그룹 데뷔에 10억, 멤버들 수입은 ‘제로’


걸그룹을 데뷔시키기까지는 멤버들뿐만 아니라 제작자들에게도 인내와 고뇌의 시간이 이어진다. 담보할 수 없는 성공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피트라이브 엔터테인먼트의 김일겸 대표이사는 “그 비용이 적어도 10억원”이라고 말했다. “데뷔까지 숙소는 물론이고 각종 트레이닝 비용, 인건비, 녹음비 등 아이돌이라면 5억, 10억은 기본이에요. 각종 프로모션을 가미하면 15억, 20억도 들고요.”

 

실제로 하나금융투자가 지난해 9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신인 개발비를 공시하고 있는 JYP의 경우 연간 7억~9억원 정도의 비용을 사용한다. 연습생이 20~30명이라 가정하면 1인당 2500만~3000만원의 비용이 드는 셈이다. 이른바 ‘잘나가는’ 그룹들도 초반 몇 년 동안에는 말 그대로 ‘빚잔치’를 벌이는 이유다.

 

상황이 이러니 멤버들에게 돌아가는 수입은 어느 시점이 되기 전까진 거의 ‘제로’에 가깝다. 러버소울의 경우, 현재 유일한 수입은 직접 작사·작곡한 데뷔곡의 음원 저작권료다. 첫 달, 통장에 찍힌 금액은 개인당 2000원이었다. 커피 한 잔 사 마시기도 빠듯한 돈이지만, 예슬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저희 작업물의 저작권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거잖아요. 정말 뿌듯했어요.” 저작권료가 가장 많이 들어왔을 땐 지난해 여름, 19만원이었다. 초아가 말했다. “‘이게 웬일이지?’ 싶었어요. 정말 놀랐죠. 근데 다음 달에 바로 4000원으로 떨어지더라고요. 하하”

 

러버소울은 평균 나이 24.3세로 데뷔했다. 사회에선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어린 나이지만, 이 세계에선 ‘많은 축’에 속한다. 걸그룹 평균 데뷔 나이가 지난해 기준으로 19.5세인 점을 감안하면, 그제야 이해가 된다. 20대 중·후반인 그들은 다른 청년들처럼 미래를 고민하고, 치열하게 자기계발에 매진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듯, 다른 청년들에게도 힘내자고, 열심히 살자고 응원하고 싶다고 했다. 초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릴 때는 내 일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주변을 둘러보니 이 나이 땐 다 힘든 거더라고요. 대학에 다니든, 일을 하든, 혹은 취업 준비를 하든지 간에요. 힘들지만 꿋꿋하게, 포기하지 않고 하다 보면 분명 밝은 날이 올 거라 생각해요.”

 

러버소울은 4월쯤 새로운 앨범으로 대중 앞에 다시 설 예정이다. 그들은 보여주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이번에는 쉬지 않고 꾸준히 활동해서 그들의 음악을,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가 걸그룹을 꿈꾸고, 또 수많은 걸그룹은 조금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부단히 달려가고 있다. 러버소울의 데뷔곡 의 일부를 소개한다. 그들이 직접 적어내려간 이 가사 내용이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오늘도 한없이 깨지고 내 가슴은 맺히고 / 오고 가는 술잔 속 풀린 두 맘속 / 웃으면서 오늘을 털어버려 / Life’s like a song of happiness, Happiness is through 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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