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 신속히 시행됐다면
  • 최재경 |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03 19:15
  • 호수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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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민들의 관심사는 이른바 민생 입법과 테러방지법 문제일 듯하다. 총선을 목전에 둔 정치인들이야 공천 과정에 마음이 쓰이겠지만, 당장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은 유가 하락과 중국 증시 불황 등 어려운 경제 상황에 걱정이 많다.

 

오죽하면 150만명 이상의 사람이 4대 노동개혁법안 등 경제활성화법안 처리 서명에 동참하고 대한상의·전경련·중기협 등 경제단체들이 함께 국회를 방문해 2월 회기 내 법안 처리를 호소했겠는가.

 

흔히 조선 왕조 최고의 개혁은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대동법 시행’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17~18세기는 힘든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가뭄과 흉년이 거듭되면서 많은 농민이 고향을 떠나 유랑하거나 굶어죽었다. 지주와 관료들은 지역 특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공납 과정에 개입해 폭리를 취하고 그 부담을 농민들에게 전가했다.

 

대동법은 피폐한 민생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조세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꿨다. 구하기 어려운 지역 특산물 대신 쌀로 세금을 내게 해서 방납의 폐해를 없앴고, 재산과 무관하게 가구 단위로 균일하게 부과하던 세금을 토지 소유 면적 기준으로 매겼다. 지주들은 가진 땅의 면적에 따라 세금을 더 내고 방납 과정의 특권을 잃었지만 가난한 백성들의 조세 부담은 80%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성들은 밭에서 춤추고, 개들은 아전(관리)을 향해 짖지 않는’ 대동(大同) 세상이 된 것이다.

 

대동법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 처음 도입된 이후 전국적으로 시행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1651년(효종 2년) 김육의 건의로 충청도에 본격 실시됐고, 수십 년간 격렬한 공방을 거친 후 호남과 영남으로 확대됐으며, 1708년에야 전국적으로 시행됐다. 기득권을 잃고 세금을 더 부담하게 된 지주 계층의 거센 반발에 맞서 대동법에 모든 것을 건 김육 선생의 치열한 삶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대동법으로 세금 부담이 줄어든 백성들은 숨을 쉴 수 있게 됐고, 특산물 대신 쌀로 세금을 납부하게 되자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구매하게 돼 상공업이 발달했다. 상공인 층의 성장이 봉건적 신분 질서를 와해시키면서 붕괴 직전의 조선 사회가 기운을 되찾아 영·정조 시대의 경제 발전과 문화 융성을 이룰 수 있었다.

 

대동법이 아니었다면 조선이 100년 먼저 망했으리라는 시각이 있다. 한 세기의 지연 없이 시행되었다면 질곡의 근대 역사를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려운 시기에는 비상한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 경제가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고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하루하루가 불안한 시기에 임기 만료를 코앞에 둔 19대 국회가 소모적인 힘겨루기만 계속하니 지켜보는 국민들은 답답하다. 진정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삶을 걱정한다면 당면한 경제 위기 극복과 민생 안정을 위해 진지한 토론과 조속한 법안 처리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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