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놀라움으로, 또 두려움으로
  • 이민우 기자 (mwlee@sisapress.com)
  • 승인 2016.03.15 02:18
  • 호수 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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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르포] 이세돌이 AI 알파고에 2경기 내리 패하자 “소름 끼친다”
국내외 취재진들이 3월9일 서울 종로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와의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인간에 대한 인공지능(AI)의 도전이 시작됐다.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이세돌 9단과 AI 컴퓨터 ‘알파고’가 맞붙는 ‘세기의 대결’이 연일 화제다. 단순히 승패의 문제가 아니었다. AI의 능력이 어느 수준까지 올라왔는지, 또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3월9일부터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에서 알파고는 오로지 인간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바둑에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상대는 세계 최강자인 이 9단이었다. 그간 바둑은 경우의 수가 10의 360제곱에 달해 계산조차 불가능한 분야로 알려졌었다. 1초에 10만번의 연산 능력을 가진 알파고라 해도 승리는 어렵다는 게 바둑 고수들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첫 패배는 실수라고 여겼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알파고는 초반부터 이 9단을 강하게 몰아세웠다. 수많은 위험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이 9단마저 당황시켰으니, 시민들의 심리적 당혹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컴퓨터가 0과 1로 이뤄진 이진법으로 인간의 이성과 종합적인 판단 능력을 모방할 수 없다고 여길 수 있을까.

3월9일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컴퓨터 ‘알파고’의 첫 대국이 시작되기 전, 서울 성동구 마장동의 한국기원에 모인 바둑 관계자, 시민들의 모습에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승패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알파고의 승리를 예상하는 건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했다. 앞서 한 설문조사에서 이 9단과 알파고의 승리를 점치는 시민은 반반으로 나뉘었다.

그들의 관심 대상은 오직 ‘미지의 영역’인 알파고였다. 알파고가 어떤 수준의 바둑을 선보일지에 집중됐다. 일을 하루 쉬고 한국기원을 찾았다는 김주년씨(남·40)는 “바둑은 경우의 수가 사실상 무한대”라며 “바둑은 인공지능이 하기 어려운 영역이라 인간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둑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대학생 이재복씨(남·24)도 “이세돌 사범님이 이길 것”이라며 “알파고 실력이 궁금할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국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경기 초반부터 강하게 몰아붙이는 알파고의 기세에 다들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국기원을 찾은 시민들에게 대국을 해설하던 이현욱 8단은 대국이 시작된 지 40여 분 만에 “기계가 이럴 수 있나. 인간이 두고 있는 것 같다”며 “너무 소름 끼친다”고 평가했다.

이 9단도 인간이었다. 그 또한 알파고의 실력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경기 초반 정석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마치 알파고의 실력을 확인하려는 듯 변칙수를 썼다. 이 9단은 특유의 공격성을 보이며 밀어붙였지만, 알파고 또한 전형적인 방법으로 응수했다. 강(强) 대 강(强)의 대결이었다.

이현욱 8단은 대국이 시작된 지 1시간 50분가량이 지날 무렵 알파고의 실수가 나오자 “컴퓨터에 과부하가 일어난 게 아닌가”라며 “사실상 승부가 기울었다”고 했다. 프로 기사의 대결에선 사실상 경기를 뒤집기 어렵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기계는 실수하지 않는다’는 일반 상식을 뒤엎고 가볍게 인간의 승리로 기우는 듯했다. 이때까지만해도 알파고에 대한 평가에 온통 관심이 집중됐다.

 

바둑 팬들이 3월9일 서울 광진구 마장동 한국기원에 모여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첫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1국은 이창호, 2국은 이세돌 같았다

첫 대국을 지켜보던 바둑 국가대표팀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알파고가 우변 흑집에 침투한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알파고의 102수는 승패를 결정짓는 ‘묘수(妙手)’가 됐다.

표정 역시 한순간 굳어졌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삶의 희비가 담겨 있다’는 가로 세로 각 19줄의 바둑판이 담겨 있었다. 어느 누구도 섣불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스크린을 통해 전해져오는 이 9단의 표정에도 밀리는 기세가 역력했다. 방청객들은 승부처가 된 102수에서 이 9단이 다음수로 ‘묘수’를 찾아낼 것으로 기대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현욱 8단은 “이세돌 9단이 경기를 뒤집기 힘들 것 같다. 사실상 패배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기원에 모인 시민들 사이에서는 ‘아이고!’라는 탄식과 함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상문씨(남·70)는 “이 9단이 컴퓨터(알파고)에게 질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영수씨(남·78)는 “알파고가 아니라 알파고를 만든 인간이 이긴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성룡 9단은 “알파고의 실수도 계산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실수일 수 있지만 경우의 수를 없애고 결국 이기는 수를 둔 것”이라면서 “사람을 갖고 논 것과 다름없다. 소름 끼친다”고 평가했다.

세계 바둑 최강자인 이 9단은 대국이 끝난 후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문을 열었다. 이 9단은 “초반의 실패가 끝까지 이어졌다. (알파고가) 이렇게 바둑을 둘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굉장히 즐겁게 뒀고, 첫판을 졌다고 흔들리지는 않는다”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유지했다.

3월10일 2국에 나선 이 9단은 전날의 패배를 만회하려 했다. 더 이상 실력을 확인하고자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알파고의 공격을 안정적으로 받아쳤다. 철저히 실리를 추구했다. 그런데 결과는 전날과 같았다. 승부가 뚜렷해 집 수를 셀 필요도 없다는 ‘불계패(不計敗)’의 연속이었다.

이 9단은 초반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이 9단이 백을 쥐면서 7집 반을 더 얻어내게 됐다. 전날의 패배를 통해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며 독기를 품은 모습이었다. 전날보다 표정은 더욱 어두웠다. 대국 도중 커피를 마시며 자세를 자주 고쳐 앉는 등 긴장한 모습도 역력했다.

이 9단은 경기 내내 장고(長考)를 거듭했다. 알파고와 30분가량 시간차가 벌어지기도 했다. 10집 이상 격차를 벌렸던 이 9단은 대국 막바지에 초읽기에 몰렸다. 결국 시간에 쫓긴 이 9단은 돌을 거둬들였다.

그의 얼굴은 붉어졌다. 끝내기 과정을 곱씹어보기 위해 돌을 들지만,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돌이켜서 어느 순간 판세가 역전된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심장조차 없는 상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국에서 알파고의 기풍(棋風)은 바둑계의 전설 이창호 9단과 흡사했다. 상대방의 날카로운 공격을 무덤덤하게 받아주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승부를 걸었다. 선공으로 압도하고 상대방의 ‘대마(大馬)’를 잡아 이기는 바둑이 아니었다.

2국에 나선 알파고는 정반대의 전술을 택했다. 마치 이세돌 9단의 모습을 복제한 듯 보였다. 이 9단이 전날의 패배를 의식해 두텁고 안정적인 바둑을 선보이자 알파고는 변칙수를 쓰면서 공격적인 승부를 펼쳤다. 2국을 해설하던 김성룡 9단은 “알파고가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둑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첫 대국을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바둑 최강 고수마저 떨게 만든 알파고의 ‘위력’

이날 이 9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알파고는 사실상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종합 전적 2전 2승. 알파고는 세계 최강자를 상대로 도무지 믿기 어려운 승리를 따냈다.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 대표는 “우리에게 믿기 힘든 결과”라며 “알파고는 이번 게임에서 아름답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보였다”고 말했다.

바둑 고수들에 따르면, 이 9단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대국 내내 좋은 수를 뒀다. 그런데 경기는 역전됐다. 결과적으로 알파고가 ‘최선의 수’로 응수했기 때문이다. 12대의 슈퍼컴퓨터와 연결된 알파고는 ‘최선’을 찾았다. 대국 막바지 끝내기 과정에서 묘수까지 뒀다. 바둑 고수들조차 생각하지 못한 수였다.

이현욱 8단은 “1국과 달리 이세돌 9단이 본인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했는데도 졌다”며 “이젠 알파고가 최소한 인간 프로 기사 정상급과 같은 실력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송태곤 9단은 “1국에선 이세돌의 실수가 많았지만 2국은 잘 뒀다. 오히려 이세돌의 실수를 보지 못했고 알파고가 실수를 했는데 승리는 알파고의 몫이었다”며 “그래서 2국 패배의 충격은 1국 패배의 10배 이상”이라고 밝혔다.

유창혁 9단은 “알파고가 어제는 끝내기에서 실수했지만 오늘은 이세돌 9단보다 강한 모습을 보였다”며 “이세돌 9단도 끝내기 승부를 노렸지만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형세가 됐다”고 말했다. 유 9단은 “3국에서는 이세돌 9단이 초·중반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며 “초·중반 전투력은 알파고가 강하기 때문에 좀 더 어려운 바둑을 둬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성룡 9단은 “바둑 전문가들이 (대국 전) 오판을 했는데 알파고가 한 판이라도이기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한 판이라도 이기면 대성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9단은 오늘 커제(柯潔)와의 결승전에 임하는 자세와 같았고, 뚜렷한 패착을 찾을 수 없었다”고 알파고의 실력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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