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에 빠진 김정은 출구가 안 보인다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북한 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17 19:44
  • 호수 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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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당 대회 앞두고 출구전략 짜기 힘들어

평양 권력의 핵심부를 겨냥한 국제사회의 압박 파고가 높다. 이번만큼은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감행한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도발 본능을 꺾어버리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듯하다. 한·미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결의안 2270호에 찬성표를 던졌고, 그 이행에까지 본격 착수했다. 북한 선박의 자국 항구 입항 금지를 시작으로 금융 거래와 인적·물적 교류 차단 쪽으로 보폭을 넓혀나갈 기세다. 북한의 태도 변화나 큰 틀의 정세 변화가 없으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실 안보리 결의가 나온 지 사흘 만인 지난 3월5일 불거진 필리핀 당국의 북한 화물선 진텅호 억류 사태는 김정은과 평양 지도부에 충격일 수 있다. 무기를 비롯한 불법 거래 물품을 싣거나 의심할 내용이 없는데도 선박을 몰수하고 선원을 추방했다는 건 정상적인 국제 상거래 활동이 사실상 전면 차단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과 미국, 유럽연합(EU) 등이 속속 독자적인 대북 제재 방안을 내놓음으로써 북한은 사면초가에 빠진 형국이다. 중국마저도 예상보다 강경한 입장이다. 대북 제재를 육로와 해상에 이어 항공 쪽으로 확대해 북·중 간을 오가는 북한 고려항공 비행기와 승객 및 화물까지 철저하게 점검한다는 입장이다.

 

3월9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핵무기 연구 부문 과학자·기술자들을 만나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지도하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강력한 대북 제재에 당혹감 느끼는 김정은

 

김정은이 당혹해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3월9일자 로동신문을 통해서는 자신의 ‘핵무기연구소’ 방문 소식을 공개하면서 핵탄두를 살펴보는 사진을 여러 장 실었다.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의 선제타격 언급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하며 위협의 수위를 올리려 했다. 실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을 알아달라는 제스처다. 김정은이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북한 당국의 다급함이 드러난다는 평가다. 이튿날에는 사거리 500㎞로 추정되는 단거리 미사일 2기를 동해안으로 발사했다. 핵탄두를 장착해 남한 전역을 사정권으로 하는 투발(投發) 수단을 갖췄음을 과시하려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3월3일 김정은은 신형 대구경 방사포 시험사격을 참관한 자리에서는 “실전 배비(配備)한 핵탄두들을 임의의 순간에 쏴버릴 수 있게 항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 군부와 노동당 유관 부처는 대미·대남 비난 성명을 경쟁적으로 내놓으며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대남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남북 간 경협·교류 파기를 주장하며 금강산과 개성공단의 남측 기업과 관련 기관의 자산을 청산해버리겠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개성공단 9249억원, 금강산관광지구 3599억원으로 모두 1조2848억원 규모다. 3월10일자로 공개한 성명에서 조평통은 “박근혜 역적 패당에게 치명적인 정치·군사·경제적 타격을 가해 비참한 종말을 앞당기기 위한 계획된 특별 조치들이 연속 취해지게 될 것”이라는 예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위협을 행동으로 보여줄 뾰족한 후속 카드가 없다는 데 북한의 고민이 있다. 제재와 압박 국면을 자초한 건 새해 벽두부터 잇달아 핵·미사일 도발을 벌인 김정은이다. 지난해 말 수면 밑에서 워싱턴과의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타진했다가 거절당하자 긴장 조성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런데 대책 없이 지나친 대립각을 세우다 보니 너무 멀리 와버리고만 것이다.

 

지난해 8월 목함지뢰 도발처럼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당시엔 ‘48시간 시한부’ 운운하며 대남 압박을 시도하다 실패로 돌아가자 지뢰 도발 유감 표명과 남한 측의 대북 심리전 방송 중단을 맞바꾸는 8·25 합의로 매듭지었다. 그리고는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의 영도력으로 전쟁 위기를 막았다”고 주민들에게 대대적인 선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북한이나 북·미 간에 풀 수 있는 양자 문제가 아닌 복합방정식이 돼버렸다.

 

더욱이 한반도의 정세는 북한에 매우 불리하게 조성돼 있다. 무엇보다 ‘키 리졸브(KR)’에 이어 독수리(FE) 한·미 합동 군사연습이 4월말까지 이어진다. 최강의 스텔스 전투기로 불리는 F-22랩터와 B-2 전폭기,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 핵잠수함 노스캐롤라이나 등 미국의 핵심 전력이 모여들었다. 미군 1만7000명과 한국군 30만명이 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연습이 북한에 무력시위를 하듯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의 목을 겨냥한 ‘참수작전’이란 말이 공공연히 군 당국자와 언론에 오르내리는 상황이 됐다. 김정은이 공개 활동을 중단한 채 시간과 장소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통치 행보를 하는 건 이런 분위기 때문이다.

 

대북 제재로 리더십 시험대 오른 김정은 체제


이처럼 민감한 시점을 빤히 앞두고 도발의 고삐를 당긴 김정은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 군 당국자는 “노련한 북한 군부의 고위 인사들은 이런 상황을 당연히 예견했겠지만 김정은에게 보고하거나 도발을 만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공포정치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당과 군부의 측근 간부들이 제대로 된 조언을 할 수 없는 이른바 ‘의사결정 과정의 경직성’이 극에 달한 상황이란 진단이다.

 

5월초 개최될 예정인 노동당 7차 대회도 부담이다. 김정은이 지난해 10월 소집을 예고한 행사다. 1980년 6차  대회 이후 36년 만에 열린다는 점에서 김일성·김정일 시대를 마감하고 김정은 시대를 열겠다는 비전을 선포하는 자리다. 무엇보다 경제계획 등 주민들이 관심을 가질 ‘먹고사는 문제’를 풀어줘야 하는 숙제가 김정은에게 던져졌다. 그런데 경제 제재를 주축으로 한 국제사회의 대북 봉쇄망이 촘촘히 펼쳐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벌써부터 중국과의 교역에 문제가 생겨 장마당 물가가 들썩이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자칫 이런 문제가 젊은 최고지도자의 미숙함 때문에 초래됐다는 말이 돈다면 리더십에 큰 손상을 입을 수 있다.

 

김정은으로서는 집권 5년 차에 큰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핵무기를 거머쥔 채 국제사회를 겁박하고 있지만 쉽게 쓸 수 없는 카드라는 데 함정이 있다. 그렇다고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에 이대로 꼬리를 내렸다가는 스타일이 크게 구겨진다. 평화협정을 내세워 대미 접근을 하려 해도 오바마 행정부는 ‘선(先)비핵화’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다. 개성공단 폐쇄로 배수진을 친 박근혜 정부는 이번에야말로 북한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분위기다. 북한인권법 통과까지 맞물리면서  대북 압박의 강도는 한층 높아졌다. 무엇보다 서울은 4월 총선으로, 워싱턴은 12월 대선으로 부산하다. 북한과 쉽게 대화 테이블에 앉거나 주고받기를 할 상황이 아니란 얘기다. 김정은의 출구전략 짜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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