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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니…

기 못 펴는 순수 창작물 대신 스크린 점령한 ‘실화 영화’들

허남웅 | 영화 평론가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17(Thu) 20:28:22 | 13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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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實話) 영화가 강세다. 물론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영화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실화는 늘 영화의 좋은 소재였다. 실화를 선호하는 분위기는 변함없지만, 실화를 대하는 창작자와 팬들의 반응은 한국과 할리우드 모두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제는 단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남우주연상 수상이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 출연해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실재 인물 휴 글래스를 연기했다. 작품상의 영예는 <스포트라이트>에 돌아갔다. <스포트라이트>는 수십 년 동안 은폐됐던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해 실상을 알린 언론사 보스턴글로브의 탐사보도팀 ‘스포트라이트’의 실제 활약상을 그대로 영화에 옮겼다.

 

<스포트라이트>, <동주>, <귀향>,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 (주)팝엔터테인먼트·(주)와우픽쳐스·(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메가박스㈜플러스엠

아카데미는 전통적으로 실화 바탕의 작품과 연기에 높은 점수를 부여해왔다. 그와 같은 보수성을 근거로 이번 아카데미 수상 내용에 의미를 부여하는 평가도 있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적확한 평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작품상의 경우 총 8편의 영화가 후보에 올랐다. 그중 <레버넌트>와 <스포트라이트>를 포함해 <룸> <스파이 브릿지> <빅 쇼트>가 실화 바탕이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마션> <브루클린>은 프랜차이즈이거나 소설이 원작인 영화다. 아카데미가 지난 1년간의 작품들을 종합한 시상식인 것을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실화가 강세를 보였다는 의미다.

 

할리우드, 공통의 관심사 발굴에 사활 걸어


인지도 높은 배우 확보와 볼거리에 큰돈을 쏟아붓는 할리우드의 특성상 특정 계층에 어필하는 매니악(maniac)한 소재는 위험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사회가 고도로 세분화되고 사람들의 관심사가 다변화하면서 할리우드는 이제 공통의 관심사를 발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그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실화다. 우리 이웃의 소소한 사연부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사고까지, 실화는 신문의 한 칸짜리 하단 기사에서 방송 뉴스의 첫 번째 꼭지까지 곳곳에 넘쳐난다. 관객의 감정선을 고려해 스토리라인을 설계하는 데 도가 튼 할리우드의 입장에서 먼저 발굴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실화에 대한 신뢰는 한국 영화계가 더 각별하다. 한국은 예부터 사실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SF나 공포물 같은 특정 장르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지금 박스오피스에서 높은 순위를 점하고 있는 작품 중 <귀향>과 <동주>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사실을 끌어와 전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흥행에서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귀향>과 <동주>의 흥행은 영화적 재미와는 별도로 역사에 대한, 특히 일제 강점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지난해 말 전격적으로 체결된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협상이 졸속이었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역사 제대로 알기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그런 사회 분위기를 타고 <귀향>과 <동주>는 역사 교육의 일환처럼 세대를 가리지 않고 관객을 대거 극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몇 년 전부터 충무로에서 단골 소재가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흥행과 작품성 모두를 검증받은 장르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사료(史料)가 잘 보존되어 있어 창작자로서는 역사적 사실을 취한 후 상상력을 더하는 것만으로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기가 용이해졌다. 사극에 익숙한 관객에게 어필하기도 좋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은 극장 성수기의 킬러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그 핵심은 우리 이야기라는 점이다. 한국인의 자국 영화 사랑은 유별나다. 전 세계에서 할리우드 영화가 시장을 독점하지 못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한국 영화의 발전은 차치하고, 아무리 뛰어난 할리우드 영화라도 우리 이야기가 아니므로 감정이입이 쉽지 않아 흥행에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때 판권 경쟁이 치열했던 일본 장르소설의 영화화가 더디거나 흥행에서 큰 재미를 못 본 이유는 각각 각색 과정에서 배경의 현지화에 난항을 겪거나, 우리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건 꼭 일본 장르소설의 영화화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 영화의 투자 과정에서도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보다 실화 소재의 작품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일례로, 지난겨울 한국 영화의 기대작으로 평가받던 <히말라야>와 <대호>가 맞붙었을 때 관객이 호감을 보인 영화는 <히말라야>였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소재로 한 <대호>보다 엄홍길 대장이 실제로 겪었던 사건을 극화한 <히말라야>가 실화라는 점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은 것이다.

 

역사 이해·교육·언론 기능까지 수행

 

예전에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생소한 볼거리에 대해 ‘영화 같은 일’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는 했다. 지금은 ‘영화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의 강도는 연일 높아지고 있다. 이를 취재하고 알려야 할 언론이 예전만큼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실화를 다루는 영화의 방법론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암살>과 <베테랑>의 1000만 흥행은 그런 점에서 징후적이라 할 만했다. <암살>처럼 역사와 오락을 접목해 역사의 중요성을 알리는가 하면, 재벌 3세의 악행을 취한 <베테랑>처럼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지도층에 대한 처벌과 단죄를 영화로 행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제공한 것이다.

 

이처럼 실화 소재의 영화는 단순히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영화화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영화의 사회적인 파급력까지 고려해 역사 이해와 교육과 언론의 기능까지 수행한다. 앞으로도 실화 영화는 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영화가 존재하는 한 실화는 영화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런 실화를 영화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에 초점을 맞춘다면 같은 실화  영화일지라도 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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