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시간에 멈춰 선 우리 모두의 ‘여자친구’
  • 정덕현 | 대중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17 20:29
  • 호수 137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워 청순 그리고 유예된 시간, 걸그룹 여자친구가 대중에 파고드는 법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깨지진 않을 거야. 사랑해 너만을 변하지 않도록 영원히 널 비춰줄게.’ 걸그룹 ‘여자친구’의 데뷔곡이었던 <유리구슬>의 가사 첫 대목은 일찌감치 이 새로운 걸그룹의 탄생을 예감케 한 면이 있다. 투명해 약할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쉽게 깨지지는 않는 그런 이미지. 물론 그 투명함이란 순수함과 청순함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여자친구에게 붙은 ‘파워 청춘’이라는 지칭은 마치 이 걸그룹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리구슬’에 대한 설명처럼 보인다.

 

‘너도나도 섹시’ 콘셉트에 싫증 난 대중들


여고생의 모습을 이미지화한 여자친구는 <유리구슬>의 뮤직비디오에서 고등학생들의 일상을 보여줬다. 등교하는 모습에서 시작한 뮤직비디오는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는 소녀들과, 그러다 선생님에게 걸려 벌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간간이 걸그룹으로서의 노래와 춤을 추는 모습을 중간중간에 삽입해 넣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과 편집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것은 여자친구라는 걸그룹이 기존의 걸그룹들이 해왔던 ‘여신’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공공연히 밝히는 일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봤던 여고생 같은 모습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대중과 눈을 맞추듯 화면을 보고 노래를 부를 때는 그 청순한 눈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이미지. 바로 이것이 여자친구가 <유리구슬>부터 <오늘부터 우리는>, 그리고 <시간을 달려서>로 이어지는 학교 3부작으로 세운 이들만의 독보적인 위치다.

 

걸그룹의 세대교체. 이제 데뷔 1년을 넘긴 여자친구는 데뷔곡 을 시작으로 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대세 걸그룹으로 자리 잡았다. ⓒ 뉴스뱅크이미지

물론 여자친구의 이런 소녀 전략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과거 S.E.S나 소녀시대의 초창기 시절, 또는 에이핑크 같은 걸그룹들이 보여줬던 모습이다. 특히 소녀시대의 초창기 레전드 곡으로 불리는 <다시 만난 세계>는 확실히 여자친구라는 걸그룹이 적극적으로 참조한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소녀 전략이 새롭게 다가왔던 건 K팝 한류와 함께 이른바 걸그룹 러시가 일어나면서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 무수한 걸그룹들이 저마다 섹시 코드를 들고나와 경쟁했던 그 시기의 풍경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음악 또한 마찬가지로 자극 일색이었다. 이른바 후크송(짧은 후렴구 반복)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걸그룹들의 노래들 속에서 어떻게 하면 대중의 귀를 낚을까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결과는 섹시 콘셉트를 내세웠던 걸그룹들의 동반 추락이었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변별력이 없는 섹시 콘셉트의 물결 속에서 ‘여자친구’라는, 어떻게 보면 화장을 지워버리고 고교생의 풋풋함으로 돌아간 걸그룹은 오히려 독보적으로 보였다.

 

여자친구는 <유리구슬>을 통해 ‘투명해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지향을 드러낸 후, 마치 그것을 실증해 보이기라도 하듯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춤을 추는 모습으로 대중의 마음을 열었다. 사실 거창하기보다는 너무나 소소하게까지 느껴지는 여자친구라는 이름의 걸그룹은 한 라디오 공개방송에서의 모습이 직캠을 타고 퍼져 나가면서 화제가 되었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무대 위에서 무려 8번이나 넘어지면서도 벌떡 일어나 끝까지 공연을 마치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파워’이면서 ‘청순’이었다. <오늘부터 우리는>이라는 곡이 역주행을 시작하고 결국 차트 정상에까지 오르게 된 건 이 ‘파워 청순’을 실증해 보여준 직캠의 영향 덕분이었다.

 

‘파워 청순’은 어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파워’의 의미를 ‘피나는 노력’으로 바꿔 읽어보면 왜 여자친구가 이 두 이미지의 조합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별하달 게 없어 보이고, 여신은 더더욱 아닌 평범하고 가녀리게 보이기까지 하는 청순한 소녀들이 죽을 듯이 노력하는 모습에 대중의 마음은 무장 해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서기보다는 그냥 그 자리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대중들이 다가오게 했다.

 

대중이 완성시키는 걸그룹 시대의 도래


최근 들어 걸그룹을 만드는 건 기획사지만, 완성시키는 건 대중이란 말이 있다. 완전체로서 강림한 여신들은 더 이상 대중의 관심사가 못 된다. 대신 대중 스스로가 관여해 지지해주고 그로 인해 성장하는 모습을 담은 그런 존재로서의 걸그룹이 주목받는다는 것이다. 실력파 걸그룹이었던 EXID의 <위 아래>가 차트 역주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대중이 발굴해낸 ‘직캠’의 영향이 아니었던가.

 

물론 여자친구의 성공은 단순한 이미지만의 성공이 아니다. <유리구슬>이나 <오늘부터 우리는>, 그리고 <시간을 달려서>까지 어찌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는 이 곡들에는 다른 걸그룹들이 갖고 있는 이른바 ‘후크(hook)’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후크는 반복적으로 대중의 귀를 중독시킨다기보다 록적인 파괴력으로 시원한 느낌을 준다. 들으면 들을수록 지겨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아지는 건 그 상쾌하고 리드미컬한 후크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각각의 노래들보다 더 중요한 건 이른바 ‘학교 3부작’이라고 부를 정도로 노래 세 곡이 큰 변별력을 드러내기보다는 비슷비슷한 틀 안에서 변주(變奏)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녀시대가 처음에는 청순한 소녀의 모습으로 등장했다가 어느 시점이 되자 여전사의 이미지로 변신하고, 그리고 어떨 때는 섹시한 이미지로 갔다가 다시 우아한 여성으로 돌아온 과정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신들은 그만큼 긴 시간을 항상 톱의 위치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야만 가능하다. SM엔터테인먼트 같은 거대 기획사가 아닌 영세한 기획사가 추구할 수 있는 깜냥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친구는 그래서 매 노래에서 새로운 변신을 보여주기보다는 늘 변함없는 모습을 바탕에 깔아놓고 그 위에 살짝살짝 다른 이야기를 끼워넣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이 변함없는 일관성은 오히려 대중의 반색을 이끌어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