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대통령 뜻이냐, 현철 생각이냐”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31 17:56
  • 호수 1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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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사퇴 지시 받고 최형우가 내뱉은 말이 증언하는 현철의 위상

“이게 대통령의 뜻인가, 현철의 생각이냐?” 파랗게 질린 최형우 의원이 김무성 의원(현 새누리당 대표)에게 물었다. 한 장의 쪽지를 든 최 의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1997년 3월9일 저녁, 부산의 한 식당 화장실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야당 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갈 때도 ‘상도동 행동대장’다운 터프함을 견지했던 ‘천하’의 최형우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바로 직전 최 의원은 교수들과 회식 도중 김 의원이 전하는 쪽지를 건네받았었다. 쪽지엔 “후보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당 대표로서 당을 추스른 뒤…” 운운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 한마디로 차기 대권 꿈일랑은 접어두고 물러나라는 얘기였다. 김영삼(YS) 정부의 실세로 자부하며, 신한국당 대선 후보 ‘9룡(九龍)’ 중 선두 주자로 기세를 올릴 때 ‘위’로부터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당시 최 의원은 소속 의원 130명과 자파 대의원 3분의 2를 확보하면서 여론몰이에 나서는 중이었다. 당내 민정계 좌장인 허주(虛舟) 김윤환 의원과도 ‘얘기’가 돼 있었다. 김무성 의원으로부터 ‘어른 뜻’이라는 답변을 듣고 이내 고향 울산으로 향했다가 다음 날 서울에 올라왔던 최 의원은 3월11일 아침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YS 대통령 만들기를 함께했던 김덕룡 의원, 서석재 총무처 장관과 조찬을 하는 자리에서다. YS가 자신을 밀어주리라 확신했던 최 의원이 얼마나 고뇌했을까는 능히 짐작이 된다. 굳이 예단이라고 할 것 없이 뇌졸중은 쪽지에서 비롯했다고 단정해도 무방하다. 이후 정국은 이회창(昌) 후보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1997년 7월,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회창 대표와 김영삼 대통령(오른쪽). 이 대표를 아주 싫어한 YS였지만 그를 제지할 의지도, 기력도 없었다.

 

“현재 권력과 싸워선 안 돼” 철칙 익힌 ‘무대’  
 

‘최형우 배제’ 결정과 관련해 최 의원 측은 이원종 청와대 수석이나 김무성 의원, 강삼재 당 사무총장 등 이른바 ‘신(新)7인방’의 음모라고 파악한다. 이들이 ‘대통령감으로 최형우는 곤란하다. 민정계가 따라올 것 같지 않다’는 말로 대통령을 움직였다고 보고 있다. 훗날 최형우 전 의원은 “퇴임 후 우리 집에 온 YS가 나를 부둥켜안고 울고 난 뒤 ‘청와대는 참 희한한 곳이다. 나는 국수 먹으면서 정말 잘하려고 했는데 눈귀가 어두워지고 판단도 흐려지더라’고 토로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최 전 의원이 지목하는 이원종 전 수석 등은 ‘최 불가론’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강삼재는 안기부가 보관한 YS 비자금 전용, 이른바 ‘안풍 사건’ 수사 때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책임을 청와대로 떠밀다가 ‘정치적 파문’을 당했다). 한보철강 5조원 금융특혜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담화를 내는 것도 부족해 현직 대통령 아들이 구속 일보 직전인 마당에 상도동계인 최 의원을 대선 후보로 내세우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짤막하게 받아 넘긴다. 지난 일이라 말들은 이렇게 하지만 한마디로 (최 의원을 대선 후보로 삼는 것은) 당치 않다는 것이다.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나중에 정치특보) 등 청와대 관계자들은 최 의원의 착각일 뿐, 일찍 굳어진 ‘방침’이라고 일축한다.

 

 “물론 창(昌)을 대선 후보로 하는 데 대해선 반대 의견도 많았다. (昌을 데려다가) 무슨 속을 썩이려고 그러느냐는 힐난도 상당했다. 더구나 대통령은 昌을 대단히 싫어했다. 昌 총리가 헌법상 총리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건방진 XX라며 화를 발칵 냈다. 하지만 YS는 노련한 현실 정치가다. 임기 3년 차인 1995년 대구 가스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등 사고가 잇달아 터지는 등의 혼란 속에 지지율이 반 토막 정도가 아닌, 취임 첫해의 3분의 1 수준도 안 되는 20%대에 이르자 그 미워하던 昌을 신한국당에 영입(1996년 1월)했다. YS의 해임 낌새를 채고 총리 취임 127일 만에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사표를 던져 YS의 부아를 돋우었던 昌이었으나, YS로서는 그해 4월로 예정된 15대 총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YS는 홍준표·이재오·김문수 등을 영입하는 등 공천 혁명으로 대세를 뒤엎었다. YS의 승부사 기질이 여지없이 발휘된 것이다.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은 서울에서만도 새정치국민회의(현 더불어민주당)를 압도(27 대 18)하는 승리를 일궈냈다. 기력을 회복한 YS는 이인제 경기도지사에게 차기를 준비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놀랄 만한 젊은’ 신인을 일부러 언론에 흘린 것도 YS다. 하지만 이도 잠시다. 민주계 인사들, 특히 현철의 이권 개입 등이 파다한 가운데 한보 대출특혜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게 허사가 됐다. 昌이 대표최고위원(1997년 3월)에 오르는 것을 ‘양해’하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참모들도 대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들의 구속 사태에 직면해 넋이 나간 대통령에게 다른 진언을 할 계제도 못 됐다.”

 

박 실장을 비롯한 당시의 당·청 핵심들의 회고를 간추리면 이렇다. 이홍구·이수성 전 총리 등 대선 후보군 ‘다변화’가 영향력 유지·행사라는 몇몇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은 맞지만 9룡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청와대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임기 말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상실된 결과물일 뿐이며, YS는 영향력을 행사할 의욕도, 기력도 없었다는 설명이다. 

 

1997년 7월,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회창 대표와 김영삼 대통령(오른쪽). 이 대표를 아주 싫어한 YS였지만 그를 제지할 의지도, 기력도 없었다.

 


‘차기’에도 깊숙이 개입한 위세 당당 현철

 

사실 이런 것들은 다 부질없는 옛 얘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최형우 애사(哀史)’를 들추는 이유는 간단하다. 1997년 3월 최 의원이 쪽지를 받아들고 김무성 의원에게 했다는 “이게 대통령의 뜻인가, 현철의 생각이냐”라는 질문 때문이다. 최 의원이 그 기막힌 상황에서 내뱉은 제1성 가운데 ‘현철의 생각’이 ‘대통령 뜻’과 같은 무게를 갖고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차기 대권 후보를 정하는 중요 결정 과정의 한복판에도 대통령의 아들 현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장차관 인사가 어떠했을까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소(小)통령’ 별명이 새삼 실감나게 들린다. 남의 험담을 좀체 하지 않는 박관용 실장이 현철 대목에선 예외인 게 우연이 아니다. 비서실장으로 YS 집권 초반의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이후 정치특보로서 YS를 보필한 박 실장은 현철로 인해 전체 기강이 흐트러졌다고 개탄한다. 공직사회, 금융·언론계를 휘젓고 다니는 ‘특정 개인’은 내버려두고 다른 조무래기만 탓할 수도 없었지 않느냐는 아쉬움이 배어 있다.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 비서실장이 현철의 비리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가 청와대를 물러났으니 다음 수순은 자명했다는 얘기다. 현철을 말하면 할수록 YS를 욕보이는 결과가 되고 문민정부의 업적들이 폄하되기에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는 박 실장에게서는 연민이 넘친다.

 

현철씨는 여당 내에 새 정치 세력을 만들기 위해 총선 공천에 관여했다면서 젊고 개혁적인 인물들이 있으면 정권 재창출에 이로울 것으로 내다봤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를 풀이하면 당시 현철의 비중에 미뤄 ‘관여했고, 내다본’ 정도가 아니라 ‘주도했다’와 통한다. 최형우 전 의원 입에서 곧장 튀어나온 “현철의 생각?” 등도 그런 방증인데 마침 이 과정에 ‘김무성 의원’이 등장해 흥미를 돋운다. 물론 당시 김 의원의 ‘역할’보다 오늘날 ‘상황 인식과 대응’이라는 차원에서다.

 

‘김 의원’은 대통령이 차기 대권 교통정리라는 중차대한 현안의  ‘밀사’로 삼을 만큼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야당 골수들조차 몸을 사리던 1980년대 중반, 당사(黨舍) 마련 자금을 서슴없이 헌납한 돈은 YS가 여당 대선 후보 시절 받은 1000억원과도 비교가 안 되는 단비였고, 때문에라도 그에 대한 YS의 고마움과 신뢰는 대단했다. 가장 은밀해야 했던 민주화추진협의회·통일민주당·대선대책위의 재정은 그의 담당이었고 YS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행정실장이 됐다. ‘무대(무성 대장)’ 별명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주변을 두루 챙긴 호방함의 산물이다. 물론 집권 핵심에 진입하는 단계에 진통이 없지 않았고, 그때의 씁쓸한 경험이 오늘날 대선 선두 주자로서의 ‘조심스러운 행보’와 무관치 않을 터다.

 

YS, 김무성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 대단


청와대에 입성할 당시 그는 아주 쓴맛을 봤다. 최고 권력자(대통령)가 시키려 해도, 최고위 참모장(비서실장)이 응원해도 무위(無爲)에 그칠 수 있다는, 권력세계의 또 다른 경험을 한 것이다. 당정비서관에서 민정비서관으로 밀려야 했던 작은 사건 때문이다. 과정은 이랬다. 대통령 신임을 받는 실세였기에 다음에 자기가 앉을 자리는 널린 요직 가운데서 자신이 선택하면 다 되는 듯했다. 

 

그러나 곡절이 겹쳤다. 안기부 기조실장(운영차장)은 현철의 직계 김기섭에게 돌아갔고, 정무수석실의 당정비서관 자리는 주돈식 정무수석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박관용 비서실장은 주 수석이 “정 그렇다면 시험을 보게 하자”는 막무가내 제안까지 하면서 반대하는 바람에 당혹스러웠다고 회고한다(박 실장은 YS의 집권에 공이 있는 노태우 정부의 염홍철 당정비서관을 대전시장으로 보내고 자신의 경남중학 후배이기도 한 ‘무대’를 앉히려 했으나 주 수석이 완강히 반대해 결국 윤원중(후일 전국구 의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민정비서관’ 경력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훗날 경남도지사가 된 김혁규와 함께 민정 1·2비서관을 나눠 맡던 ‘무대’는 내무부 차관을 거쳐 여의도에 안착했다. 이후 YS의 두터운 신임 속에 당·정·청의 연결고리가 돼 차기 대선 주자를 논의하는 자리에까지 합류한 것이다. ‘김무성 의원’은 당시 YS의 ‘昌 감사원장 임명-임기 직에서의 배제가 우선 고려된 昌 총리 임명과 퇴출-그토록 질색하는 昌 신한국당 대표 임명과 대선 후보 용인(容認)’이란 생생한 과정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또 여당 대선 선두 주자 최형우를 주저앉히면서도 이인제 의원의 탈당과 대선 독자 출마를 방치하는 과정, 그리고 이로 인한 정권 재창출 실패도 또렷이 목격했을 게다. 살아 있는 현재 권력과 맞서는 게 얼마나 무모하며 그 갈등이 빚는 한계와 말로를 생생하게 체험했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가 새누리당 대표 취임 이후 청와대와 충돌할 때마다 물러서는 ‘조심’도 이런 데서 생겼다고 봐도 망발이 아닐 터다. 오늘의 공천 싸움을 포함해 친박계와의 다툼 때마다 ‘무른 대응’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때론 이미지를 그르치는 이런 ‘조심과 낮춤’이 전략적 후퇴 내지 양보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은데 여하튼 실전에서 익힌 권력의 법칙을 어찌 활용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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