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자유주의 이끌어온 美 경제 노선의 균열
  • 손제민│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
  • 승인 2016.03.31 18:39
  • 호수 1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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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아’ 샌더스와 트럼프 “미국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이 중산층 삶 악화” 한목소리

“제기랄, 버니 샌더스의 3월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 제출 보고서의 분량이 18만8613쪽이나 되잖아.” 미국 워싱턴의 정치분석가 리드 윌슨은 최근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미국 대선 후보들은 매달 선관위에 후원금 모금 실적과 사용 내역 등을 보고하는데 샌더스 캠프의 보고서는 수많은 소액 기부자들의 명단 때문에 늘 분량이 많다.

 

힐러리 클린턴이 슈퍼화요일 경선에서 남부 주들의 흑인 표를 압도적으로 가져가면서 샌더스가 후보로 지명될 기회가 사실상 사라졌다는 주류 언론의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샌더스 캠페인은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다. 세계 어떤 민주주의보다 돈의 영향력이 강한 미국 선거에서 샌더스는 몇 달째 힐러리보다 많은 후원금을 모으고 있다. 그는 지난 2월 후원금 모금에서 힐러리를 1400만 달러나 앞섰다. 그의 후원금은 대부분 소액 기부자에게서 나온다. 이들의 기부 열기는 얼마간 지속되다가 샌더스의 승산이 낮아지면 시들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힐러리 역시 소액 기부를 받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 열기는 샌더스와 비교할 수 없다. 그는 후원금의 많은 부분을 기업이나 거액 기부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힐러리 캠프와 민주당 주류는 전당대회 때까지 경선에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고, 후보로 지명되더라도 샌더스 지지자들을 어떻게 흡수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미 민주당 대선 후보 버니 샌더스 ⓒ AP 연합미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 EPA 연합

 


워싱턴에서 저주받은 단어 ‘주류’

 

공화당의 상황은 차라리 희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3월24일 현재 65%가 진행된 공화당 경선에서 공화당 주류는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할 정도로 도널드 트럼프의 돌풍을 막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는 7월 전당대회 때까지 후보 지명에 필요한 과반의 대의원을 확보하지는 못하더라도 1위를 할 것이 확실시된다. 공화당 주류는 중재 전당대회를 통해 트럼프의 후보 지명을 저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유권자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후보를 주저앉히고 민의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고, 당이 쪼개질 가능성도 있다.

 

1년 전만 해도 미국 대선이 이렇게 흘러올 줄 아무도 몰랐다. 클린턴 가문의 며느리와 부시 가문의 둘째아들 사이의 ‘왕조(dynasty) 대결’로 귀결될 것 같았던 선거는 예상 밖의 아웃사이더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주류 정치권과 전문가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이제 ‘주류’라는 말은 워싱턴에서 저주받은 단어가 됐다. 아직 공화당 경선에 남아 있는 존 케이식, 테드 크루즈 같은 주류 정치인들도 저마다 ‘아웃사이더 코스프레’를 한다. 주류임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후보는 힐러리밖에 없다.

 

역대 미국 대선에서 아웃사이더 바람이 이 정도로 강하게 분 경우는 없었다. 그것은 ‘정치인은 모두 썩은 놈’이라는 필부(匹夫)들의 정서가 표출될 수 있게 된 상황과 관계있다. 많은 미국인은 정치가 자기 삶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마음껏 표출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트럼프·샌더스라는 독특한 후보가 이러한 분노를 제도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 미국의 경제지표는 괜찮은 편이지만 많은 사람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특히 인구 구성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노동계급은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많이 하락했다고 믿는다. 그것이 샌더스 지지자들처럼 월가 금융기관 해체, 부자 증세와 재분배 요구로 이어지기도 하고, 트럼프 지지자들처럼 이민자들에 대한 제노포비아(Xenophobia·이방인 혐오증)와 보호무역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의 인기가 50% 정도로 높은 상황에서 민주당은 그나마 정당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지난 8년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반대만 거듭했던 공화당은 트럼프 현상 앞에서 쪼개질 위기에 놓였다는 점 정도가 차이다.

 

트럼프는 3월21일 워싱턴포스트 논설위원들과 만나 불개입주의적인 외교안보 철학을 밝혔다. ‘국가 부채가 19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에서 거품이 붕괴되는 것이 가장 걱정인 상황에서 군사비보다 미국 내 인프라 투자에 자원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는 프레드 하야트 논설실장 등 네오콘 성향의 개입주의를 지지하는 워싱턴포스트 논설위원들에게 매우 우려스러운 얘기였다.

 

트럼프는 공화당 내에서 유일하게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거짓 정보에 기반한 실패한 정책이라고 비난해 다른 후보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그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 될 수 없으며 한국·일본 등 동맹국들에 제공하는 안보에 대해서도 더 높은 청구액을 물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 문제는 유럽이 알아서 해야 하고 시리아 문제는 러시아에 맡겨둬야 한다고도 했다.

 

트럼프는 유대인 로비단체 앞에선 동맹국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약속하는 등 청중에 따라 얘기를 다소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본심은 핵심 지지층인 백인 중산층 앞에서 하는 말에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지난 수십 년 사이 공화당 대선 후보 가운데 가장 불개입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군산(軍産)복합체와 강한 연계를 가진 100여 명의 공화당 외교안보 전문가가 트럼프 반대를 선언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샌더스·트럼프 모두 ‘불개입주의 경향’


이러한 생각은 샌더스에게서도 나타난다. 샌더스는 2003년 이라크 침공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던 결정을 자랑스러워하며, 힐러리의 매파적인 외교안보관을 공격하는 데 활용한다. 그는 군사 개입은 최후의 카드로 남겨두고 외교와 협상을 통해 미국이 문제 해결을 주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방 예산을 지금보다 더 줄여 복지 강화와 국내 인프라 재건에 써야 한다고 설파한다.

 

미국의 불개입주의 경향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물려받은 버락 오바마에게서 이미 나타났다. 오바마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며 레드라인을 넘었지만 자신의 말을 뒤집고 군사 개입을 자제했다. 트럼프와 샌더스 모두 ‘오바마 독트린’으로 불리는 이러한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아울러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끌어온 미국 경제 노선에도 균열이 새겨졌다. 샌더스와 트럼프 모두 미국이 체결해온 자유무역협정(FTA)들이 미국 중산층의 삶을 악화시켰다고 믿는다. 트럼프는 외국과의 협상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입장인 데 비해 샌더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체가 ‘바닥으로의 경쟁’을 가속화하는 구조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본다. 일부 업종과 거대 기업, 금융자본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현 체제가 지속될 수 없다는 생각이 이보다 강력하게 표출된 적이 없다. 사회주의자라는 명함을 달고 나온 샌더스가 미국 사회에서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유의미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 예외적인 선진산업국가 미국에서 나타난 큰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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