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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름’으로 권좌에 오르다

동남아 전역, 국부<國父>나 대통령 가문이 정치권력 장악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송창섭 기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4.06(Wed) 14: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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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 만에 출범하는 미얀마 문민정부 대통령에 취임한 틴 쩌(왼쪽)와 ‘민주화 영웅’ 아웅산 수치 여사. © AP연합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미얀마 아웅산 수치 여사의 공통점은? 이들은 모두 제국주의 체제에서 자국의 독립을 이끌어낸 독립 영웅, 국부(國父)의 후손들이다. 아웅산 수치가 미얀마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최근 동남아에선 국부를 배출해낸 정치 가문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25년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전국민주동맹(NLD)은 군부를 누르고 상·하원 의석의 59%를 차지했다. 당초 아시아 민주주의의 바로미터인 미얀마에선 총선 이후 민주화 바람이 거셀 것으로 예상됐지만 최근 수치 여사의 태도를 보면 고개를 가로젓게 만든다. 선거 직후 서구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수치 여사는 “차기 대통령은 아무런 권한이 없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실제로 그는 3월15일 자신의 운전기사이자 비서실장 출신인 틴 쩌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한 데 이어 자신은 외무장관직을 자청해 대외적인 업무를 챙기려 하고 있다. 미얀마에선 머지않아 대통령보다 힘센 장관을 보는 일이 가능하게 됐다.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 국부 리콴유 아들

지금은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주투사로 성장했지만 수치 여사 역시 정치 입문 초기에는 아버지의 후광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치 여사의 선친은 미얀마 국부로 추앙받는 아웅산 장군이다.

인도네시아에도 국부 가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공식적인 국정 최고지도자는 조코 위도도(Joko Widodo) 대통령이지만 그가 속해 있는 민주투쟁당(PDIP)의 총재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대통령의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다. 최근 인도네시아 정국이 여소야대에서 여대야소로 재편되면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다소 커졌지만, 메가와티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메가와티는 2001년 와히드 대통령이 탄핵돼 남은 임기인 2004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 국정 운영 경험까지 갖추고 있다. 당초 인도네시아 정가에선 2014년 치러진 대선에서 메가와티가 다시 대통령직 도전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그는 직접 나서지 않고 사업가 출신의 조코위도도를 밀어 당선시켰다. ‘킹’보다는 ‘킹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막후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계산이었는데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인도네시아와 인접해 있는 싱가포르의 리셴룽(李顯龍) 총리 역시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인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아들이다. 리콴유는 오늘날 싱가포르를 설계한 인물로 ‘비즈니스 인사이더’ 등 서방 언론은 그를 가리켜 ‘지난 세기 가장 성공한 독재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가난한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싱가포르를 아시아 금융·무역 허브로 만든 리콴유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기 전부터 장남인 리셴룽을 차기 총리로 점찍었다. 리셴룽 총리는 부친이 총리로 재직하던 1984년 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2004년 7월 2대 고촉통(吳作棟) 전 총리에 이어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 밖에도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역시 초대 대통령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딸이다. 이렇다 보니 최근 동남아에서 가문 정치(Family Politics)의 그림자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국부까지 가지 않더라도 국가원수를 배출한 가문끼리의 격돌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장기 독재로 악명 높던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린 ‘피플 파워’가 등장한 지 30주년이 되는 올해, 필리핀 정국은 연일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오는 5월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부통령 선거에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가 출마를 선언해서다. 현지에선 현직 상원의원인 마르코스 주니어가 부통령 자리를 발판 삼아, 차기 또는 차차기 대권 도전에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로선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주요 여론조사 기관의 조사에서 마르코스 주니어는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자 마르코스 집권 시절 피해자들이 마르코스 주니어의 부통령 불출마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어 그가 이런 반대 기류를 무릅쓰고 부통령 자리에 오를지가 필리핀 정가에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현재 필리핀을 이끌고 있는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은 마르코스 독재를 무너뜨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동남아에서 국부 또는 전직 대통령 후손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동남아 전역에 뿌리내린 가족 중심 문화와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다. 대다수 동남아 국가들은 경제 발전이 더딘 탓에 대가족 중심 문화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권력세습이나 가족끼리 권력을 나눠 갖는 것에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가 오는 5월 치러지는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 AP연합

“빽 없으면 돈이라도 있어야”…정치 후진성

여기에 태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가 갑자기 독립을 맞은 탓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못하다. 집권 세력만 외세에서 자국민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시민혁명은 여러 차례 발발했지만 이것이 정치 시스템의 선진화로 이어지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

이렇다 보니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 수준도 과거 왕정 시대를 연상케 할 정도로 권위적이다. 서구에선 상상할 수 없는 권력세습에 대해서도 전혀 부담감을 갖지 않는다. ‘누가 하든지 잘만 다스려 백성을 행복하게 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식의 발상은 부자 세습, 부부 세습 등으로 나타나면서 특정 가문이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하는 비민주적 행태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리콴유 전 총리가 주창한 ‘아시아적 가치’는 표준화된 민주주의란 없으며 각 국가에 맞는, 다시 말해 아시아만의 독특한 민주주의도 중요한 민주주의 가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적 가치는 집권 세력의 부정부패와 맞물리면서 설자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싱가포르만이 자유로울 뿐 대다수 동남아 국가에서는 집권 세력의 부정부패가 심각하다.

여기에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대다수 동남아 국가가 개발도상국이어서 부의 양극화가 심화돼 있는 것도 특정 정치 가문에 대한 쏠림 현상을 키우고 있다. 부자가 아니면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동남아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탁신 전 태국 총리나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평민 출신으로 국가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공한 사업가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다. ‘빽 없으면 돈이라도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은 동남아 정치 시스템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에 국부를 비롯한 정치 영웅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국부 가문 또는 유명 정치 가문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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