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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용 회고록] ‘사람 욕심’ 많았던 YS

믿고 쓰는 게 강점이나 너무 믿은 건 탈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ㅣ . | 승인 2016.04.14(Thu) 18:39:20 | 13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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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못 빌린다.”

 

제14대 김영삼(YS) 대통령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몇 가지 있다. ‘고집불통’, 이 고집불통의 다른 표현으로 ‘뚝심’, ‘돈 욕심은 없어도 사람 욕심은 많은 사람’, ‘본능적 감각이 빼어난 정치인’ 등등. 여기서 빠뜨려선 안 될 단어는 또 있다. 스타일리스트로서 YS다. 그가 강조하는 ‘건강’도 스타일과 무관치 않다.

 

26세에 금배지를 단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대한민국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이니까 자랑할 만도 하다. 사실 연배(年輩)를 엄청나게 따지던 시절이니만큼 20대 나이가 강점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 소리나 듣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결코 쉽지 않은 나이에 배지를 달았다. 그것도 상대를 압도적 표차로 이겼다. 이는 당시 유력 정당인 자유당 소속이라는 점과 멸치어장을 소유한 부친과 고무신 공장을 하던 장인의 물심양면 지원 결과라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건강미 넘치는 ‘예쁘장한 모습’이 점수를 따는 데 많이 기여했다는 것이다. YS 자신도 이 부분을 얘기하면 “무신(‘무슨’의 사투리)~”이라며 흐뭇해했다. 

 

그는 서거하기 2년 전까지도 인사차 방문한 필자에게 팔씨름을 자청하며 건강을 자랑했었다. 실제 85세까지도 악력(握力)은 건장한 30대의 그것이었다. 자기의 허벅지를 만져보라며 다리 근육을 으스대던 YS였다. 배드민턴을 계속해서 건강하신 모양이라고 말을 받으면 “내, 복싱도 안 했나” 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평생 다져온 체력은 정말 대단했다. 그는 원내총무·대변인·총재 등 야당 지도자로서 아무리 바빠도 남산 체육관을 거르는 일이 드물었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조깅’을 유행시킨 이후에는 조깅 마니아가 됐다. 일단 조깅을 시작한 YS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 바쁜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그랬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방한한 외국 국가원수와, 외국 순방 때는 현지에서 아침 5시면 일어나 달렸다.

 

1993년 2월27일, 첫 국무회의를 주재한 후 칼국수 오찬 중인 김영삼(YS) 대통령. 칼국수와 설렁탕은 근검의 상징이었고, YS의 자기절제는 엄격했으나 주변의 비리로 허사가 됐다. YS 오른쪽은 한완상 통일부총리. 왼쪽은 이경식 경제부총리, 권영해 국방부 장관(후일 안기부장). 맨 왼쪽이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 ⓒ 김영삼 회고사진집

 


“지도자는 건강해야”…곤경 처하자 염색 중단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에 즈음해 유엔 총회 연설차 뉴욕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한 YS는 빗속에서도 조깅을 빼먹지 않았다. 박희태 민자당 대변인(후일 국회의장)과 단둘이 새벽 조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던 YS는 “아니 이 빗속에서 조깅을~”이라며 인사하는 기자에게 “물론이지. 근데 김 동지, ‘수행’이 뭐야 ‘동행’이지”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차기 대통령 후보이자, 집권당 대표인 자신을 ‘부속물’처럼 표기한 데 대한 섭섭함의 표시였다. 박관용 비서실장 등의 설명을 따로 빌리지 않더라도 YS의 조깅은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 일정과 발언 내용·수위 등을 정리하는 중요 과정이었다(YS 본인은 얼마 전 소련 방문 때 함께 갔던 박철언 의원이 “YS를 ‘수행’한 게 아니라 ‘동행’한 것”이라는 말에 발칵, 청와대에 박 의원에 대한 ‘조치’를 강력히 요구한 바 있다). 

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청와대에서 함께 새벽 조깅을 할 때는 키 큰 클린턴에게 지지 않으려고 막판 속도를 냈다. “내가 클린턴한테 안 질끼다”는 전날의 예고를 틀림없이 이행한 것이다. 클린턴과의 조깅 일화는 YS 승부욕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한데, 퇴임 후 동네 아주머니들과 배드민턴 경기를 하다가 지는 날이면 자신이 이길 때까지 계속하자고 졸라 애를 먹인 YS였다.

 

YS의 건강 과시는 라이벌 DJ(김대중 대통령)를 의식할 때면 더했다. 민감한 대목이라 내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지팡이에 의지하는 DJ에 대한 절대 우위를 은연중 내비쳤다. “지도자는 건강해야제”라는 말은 단순한 건강 얘기가 아니었다.

 

이런 YS였기에 양복도 몸에 착 달라붙게 해서 가슴과 허리선을 살렸다. 옷맵시나 넥타이에 대한 칭찬에는 소년처럼 기꺼워했다. 몸에 붙는 양복과 더불어 YS 외모를 구성하는 다른 요소는 헤어스타일이다. 1970년대 그의 동안(童顔)과 은빛 장발(長髮)은 잘 어울렸다. 흰머리 휘날리며 ‘40대 기수(旗手·대통령 후보)’를 외치는 야당 지도자의 모습은 근사했다. ‘염문(艶聞)’ 등 여권의 악선전으로 다소 주춤하기는 했으나 인기를 보태주는 부분이었다(핵심 참모인 최형우 의원과 김덕룡 총재비서실장의 머리칼이 하얗기 때문에 ‘백두(白頭)’라야 상도동계에선 행세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젊은이들의 긴 머리가 모양 사납다고 경찰을 동원해 강제로 자르도록 했는데 YS는 저항이라도 하듯이 장발을 고수했다. 이 장발은 1980년대 들어 짧아졌고, 백발(白髮)은 대통령 취임 때부터 검은색으로 변했다.

 

YS의 머리칼 염색은 ‘사건’이었다. 청와대엔 ‘여성 팬’들의 항의 편지도 답지했었다. 그래도 젊은 대통령 이미지 고양 차원에서 염색은 계속됐다. “훨씬 젊어 보인다”는 영부인과 참모들의 조언에 염색 중단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는 청와대 관계자들의 회고다. 그러나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하던 1996년 들어서는 염색을 중단한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자신감 상실처럼 비친다. 이는 후임 대통령 DJ가 아들 홍업·홍걸 구속 사태 이후 머리 염색을 중단한 것과 상황이 너무나 흡사해 미용 전문가들의 비교 연구 대상이 됐다. 일각에선 두 대통령 모두 국민적 ‘동정’을 노린 정치적 제스처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진위 여부를 떠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염색 포기가 ‘곤경에 빠진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못 빌린다”고 했던 YS는 실제 ‘머리’는 잘 빌렸다. ‘사람 욕심’, 즉 인재를 얻으려는 노력은 아주 절절했다. 동시에 사람을 가려 쓰는 재능도 탁월했다. 또 일단 쓰면 믿고 권한을 확실하게 부여했다. 이게 영원한 경쟁자 DJ와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YS는 아무개 평이 좋다면 데려오라고 채근했다. 직접 대면해야 직성이 풀렸고 어떻게든 끌어다 쓰려고 부심했다. 이렇게 믿어주니 성심을 다하는 추종자가 늘어났다. 오랜 야당 시절을 보냈음에도 그의 캠프에는 ‘배반자’가 좀체 없었다. ‘상도동’과 ‘동교동’의 차이다.” 박관용 실장은 상도동계가 아닌 자신을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 비서실장에 앉힌 것도 YS 용인술(用人術)의 작은 사례라며 초대 각료 인선 때 YS의 그런 개성과 안목이 유감없이 발휘됐다고 했다. 물론 보안을 너무나 강조하다가 패착을 겪는 일도 심심치 않았으나 실력을 우선시하는 자세는 본받을 점이라는 것. 각계 여류(女流) 인사들을 재고 또 잰 후에 황산성 전 의원을 보사부 장관으로 발탁한 전말 등은 전형적 사례라는 전언이다. 김상철 서울시장의 경우는 사전에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한·미우호협회장 등 그의 재야(在野) 경력을 높이 평가한 YS가 고집을 부렸다는 것(김 시장은 그린벨트 형질 변경 시비에 휘말려 취임 1주일 만에 사퇴). 또한 일단 여론의 도마에 오르면 가차 없이 쳐내기도 했지만 ‘해당 본인’의 문제로 인한 것이지 YS의 ‘변덕’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신속·과감도 YS의 특장(特長)인데 박희태 법무부 장관 경질 때만 그에 대한 지극한 애정 때문에 상당 시간을 머뭇거렸다.

 

청와대 경내에서 조깅을 함께 한 YS와 클린턴 미국 대통령.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YS는 반 발짝이라도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 김영삼 회고사진집

 


전국구 누락된 손학규, 보선에 기어코 공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본래 1992년 3월 실시된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의원(비례)이 될 뻔했다. 진보 소장학자의 대표 주자로 인정받아 당초엔 전국구 명단 3번에 올렸는데 민정·민주·공화 3계파가 각자의 지분을 요구하고 이를 반영하다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를 무척 아쉬워하던 YS는 집권 첫해인 1993년 경기 광명 을 보궐선거 때 그를 공천했다. 진보 진영을 아우르는 지도자 면모를 갖추는 데 적격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물건이다’ 싶으면 기억했다가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드는 YS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손주환 청와대 정무수석과 팀을 이뤘던 염홍철 당정비서관(대전시장) 등의 술회다. 

 

손 전 대표 관련 일화는 13대 총선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끌어들일 때의 정성을 연상케 한다. 통일민주당 총재인 YS는 처음 만난 노 변호사에게 반해 홍인길 비서(후일 청와대 총무수석)에게 ‘노무현 의원 만들기’ 엄명을 내렸고 홍 비서는 30억원을 조달해 임무를 수행했다(‘노 의원’도 “돈을 원없이 써봤다”고 회고). YS의 사람 욕심, 특히 선거를 대비한 ‘스타’들 발굴은 역시 정치 9단답다. 1996년 15대 총선 당시의 김문수(전 경기도지사)·홍준표(경남도지사)·안상수(창원시장) 등 면면에선 YS의 솜씨가 읽힌다. 또 한때 상도동계에 입문했다가 YS의 3당 통합을 반대하며 합류를 거부한 모 일간지 기자 출신 K씨에 대한 YS의 대응 전말은 YS의 매력을 더하는 대목이다. K의 의협심을 평가한 YS는 비서들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누차 지시했다. 특별한 정치적 필요에서가 아니라 정(情) 때문이었다(그러나 그가 ‘꼬마 민주당’에 머무르며 자신을 비판하자 매몰차게 걷어찼다). 한편 정치적 낭만주의자이면서도 현실에 충실한 YS는 ‘불가피한 정치적 상황’에서 특정 인물을 불가불 요직에 임명했더라도 ‘그 이상’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황낙주 국회의장 ‘지명’ 등은 대표적 사례다.

 

구중궁궐 대통령에게 휴식은 ‘주요 국정 과제’


YS는 인간적으로도 매력 있는 정치인이다. 왕년의 몇몇 ‘핑크빛 사연’을 제외하면 자신에게 엄격했다. 특히 대통령이 된 후로는 그랬다. 매일 아침 고향 거제에 기거하는 부친 김홍조옹에게 문안인사를 여쭈었다. YS보다 16세 위인 홍조옹은 아들에게 행여 누가 될까 봐 2008년 작고할 때까지 몸가짐을 단속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엄격함은 식사에서도 확인된다. 상도동 식단은 시래깃국과 인절미가 주종이었는데 청와대에서는 칼국수가 중심이었다. 그나마 이따금 나오는 국산 와인도 출입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가까스로’ 등장한 것이다.

 

“YS는 본래 칼국수를 즐겼다. 성북동 칼국수집이 단골집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서는 행차가 여의치 않게 됐다. 그래서 자체 공급을 하게 됐는데 레시피는 당시 청와대를 출입하던 M 방송사 L 기자(현재 삼성그룹 사장)의 모친에게서 배워온 것이다. 이 칼국수가 개혁을 선도하던 YS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면서 청와대 대표 음식이 됐다. YS는 옛날 단골 설렁탕집을 찾아갈 때면 마냥 즐거워했다. 사실 먹거리도 먹거리지만 청와대를 잠시 벗어나는 게 기꺼웠을 터다. 외식을 흡족해하며 돌아온 YS에게 영부인이 ‘또 설렁탕이에요. 박 실장은 누린내 난다고 질색하던데’라고 웃으며 나무라기도 했다.” 박 실장의 회고다. 박 실장은 대통령의 식사가 너무 빈약해 어느 하루는 지인이 보내온 ‘보신(補身) 재료’를 접대할까 싶었지만 악소문이 걱정돼 그만둔 적도 있었다면서,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식사’가 아니라 국정 최고 책임자의 ‘휴식’이라고 했다. 최선의 결정이 가능하게끔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머무르는 (모든) 대통령의 머리를 식히도록 해주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YS와 설렁탕은 해외 순방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홍인길 총무수석이 밤중에 들여보낸 생선회를 먹고 설사로 난리가 나는 등 식욕이 왕성한 대통령이 부실한 청와대 식단과 ‘답답증’ 때문에 벌인 소동은 허다하다. 홍 수석은 “생선이 상한 게 아니라 오랜만의 회에 식탐을 내셨기 때문일 것”이라며 YS는 정말 검소했었다고 회상한다.

 

YS가 “내는 칼국수 먹으며 정말 잘해보려 했는데(현철이와 아래사람들이 사고를 쳤다)… 눈귀가 멀었었다”고 한 탄식은 변명이나 과장이 아니다. 하기야 최고 지도자가 주변을 단속하지 못한 것도 과오라면 큰 과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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