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로마의 수명 연장하고 중세 기독교 시대 열다
  • 김경준 |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4.21 19:05
  • 호수 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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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수도 이전과 기독교 공인으로 추앙받아

철학자 황제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80년 사망한 후 로마는 번영기를 끝내고 정치적 혼란으로 쇠퇴기로 접어든다. 150년이 지난 후에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245~312)와 콘스탄티누스 (274~337)는 제국을 재편해 일시적으로 안정시킨다. 콘스탄티누스는 정치·군사적 승리를 종교적 권위와 연계시켜 체제를 안정시키려는 관점에서 기독교를 공인했고, 이후 기독교는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양 중세 시대를 지배하는 정치·종교적 권력을 확보해 오늘날 세계적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의 개혁으로 제국의 수명은 연장됐으나 제국을 중흥시키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고, 사망 후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로마는 패망기에 접어든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조각상 ⓒ PCM 연합

로마에 의한 평화 시대,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일컬어지는 로마제국의 전성기는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수립한 기원전 1세기 말부터 오현제(五賢帝) 시대가 끝나는 180년까지의 200년 동안이다. 그중에서도 최전성기는 후일 5명의 현명한 황제로 불리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오현제 시대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황제의 지위는 혈연이 아니라 역량으로 승계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여기에는 공교롭게 황제에게 친아들이 없는 경우가 많았던 우연도 겹쳤다. 황제는 군사·정치적 영역에서 역량을 발휘한 젊은이를 양자로 삼아 카이사르의 칭호를 내리고 후계자로 선언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유일하게 콤모두스라는 아들을 뒀다. 그는 양자 상속 대신 친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줬으나, 불행히 능력과 인품 모두 함량 미달의 얼간이여서 재위 12년 만인 192년 31세의 나이로 친위대장에게 살해됐다. 이후 284년까지 100년간 제위(帝位)를 둘러싼 군대 실력자들의 내전이 일상화되는 이른바 군인황제 시대가 이어지는데, 가장 극심한 혼란기였던 235년부터 284년까지는 50년 동안 무려 26명의 황제가 명멸했다.

유럽과 아시아 중간 지점에 콘스탄티노플 건설

로마의 정치군사적 혼란과 비례해 야만족의 힘은 강해졌고 국경 방위가 불안해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안보 위기가 닥쳐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84년 제위에 오른 후 제국을 2개로 분할해 효율성을 높여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286년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서방 황제로 삼고 자신은 동방 황제가 돼 2명의 정제(正帝)가 되고 각각 한 명씩 제위 계승자를 정해 부제(副帝)로 임명해 총 4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4두(頭) 체제를 도입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는 서방 부제로 임명됐다. 동방 정제를 최고 수장으로 하는 분할 구조로 당장 국경 방위라는 급한 불은 껐지만 4개로 분리된 권력은 후일 더 큰 갈등으로 이어진다. 일단 위기가 봉합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5년 서방 정제와 함께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곧바로 권력투쟁이 시작됐다. 마침 아버지가 306년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사망해 서방 부제 자리를 이어받은 콘스탄티누스는 20년간의 내전을 통해 경쟁자를 제압하고 324년에 40년 만의 단독 황제로 제위에 올랐다.

콘스탄티누스의 대표적 정책은 수도 이전과 기독교 공인이다. 고대 세계 경제·문화의 중심인 그리스-소아시아 동방 지역의 우위는 로마제국의 영역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정치·행정 중심인 수도 로마와 경제·문화 중심인 동방 간의 불일치가 존재하는 가운데 콘스탄티누스는 330년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수도 이전을 결정하고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 지점에 도시를 건설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명명했다. 후일 비잔티움으로 불리다 오늘날 터키 영토의 이스탄불로 개명된 지역이다.

세속 도시에 이름을 남긴 그는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의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 역사에 깊이 각인됐다. 당시 기독교는 초기 박해 시대를 지나서 비교적 자유롭게 포교되고 있었으나 강력한 일신교의 특성상 다신교 공동체였던 로마에서는 일종의 경계 대상이었다. 전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가 로마 특유의 공동체정신을 훼손한다고 판단하고 적극적인 탄압 정책을 펼쳐 303년 교회와 성물(聖物), 성전을 파괴하고 기독교인의 모임을 불허한다는 칙령을 발표해 사제와 주교들을 투옥하고 기독교인들의 봉기를 단호하게 진압했다.

이탈리아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 Xinhua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에서 성인으로 추앙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일신교적 특성이 추락한 황제의 위상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우호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로마 황제는 공동체의 합의가 아니라 유일신과 교회의 권위에 의해 임명되며,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초월적 지위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왕권 신수설(神授說)은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이후 절대왕정 시기까지 유럽의 지배적 사고로 이어져 내려온다. 개인적으로는 권력투쟁 과정의 분기점이었던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앞둔 저녁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를 보고 계시를 받은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 공인과 함께 압류된 교회 재산도 돌려주고 필요할 경우 국가가 보상하는 적극적인 기독교 진흥책이었다. 나아가 콘스탄티누스는 황제 개인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독교에 기부하고 기독교 성직자에게 세금을 면제하고 각종 공무의 부담에서도 제외해 종교 조직 기독교의 물적 기반을 확보해 줬다. 기독교가 공인되자 그동안 잠복해 있던 기독교 내부의 교리 논쟁이 격화됐고, 그 중심에는 신과 예수의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가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해 아타나시우스파(派)를 정통으로 채택해 이후 기독교 교리를 정리했고, 명실상부한 세속과 종교 양대 권력 수장의 지위를 확보한다.

세속적 관점에서 그의 정치·행정 개혁은 로마를 혁신해 중흥으로 이끌지 못하고 쇠락하는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과 진흥책은 476년 서로마 멸망 이후 1000년의 중세기에 서유럽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토대가 됐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이민족 군주가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동족의 귀향을 허락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라면, 기독교인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위대함이라는 마그누스(Magnus)를 붙여 대제(大帝)라고 칭해지며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에서 모두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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