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아파트에서 왜 불이 났을까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6.04.21 19:21
  • 호수 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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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감식 결과 ‘청소기 코드에서 발화’LG전자 “코드 꽂아놨다고 불나지 않아”

지난해 10월21일 오전 9시20분쯤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한 아파트 6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인근 소방서에서 긴급 출동해 40여 분 만에 불은 완전히 꺼졌다. 하지만 66㎡(20평) 규모의 아파트 6○○호 내부는 시커멓게 불에 탔고 복도를 타고 나온 불길에 이웃집들도 창틀이 파손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심각한 인명 피해는 없었다. 6○○호에 사는 이 아무개씨는 불이 나기 20여 분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당시에는 얼마 후 집 안에서 불이 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병원에서 의사와 면담을 마칠 즈음 화재가 발생했다는 전화를 받고 급히 집으로 달려왔다. 그때는 이미 소방차 예닐곱 대와 소방관 30여 명이 불을 끄고 있었다.

화재가 발생할 당시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찰 조사 결과, 출입문을 강제로 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어떻게 불이 난 것일까. 남양주소방서가 화재 진압 후 작성한 ‘화재현장조사서’에 따르면, 해당 화재는 전기적 요인에 의한 발화로 추정 조사됐다.

경기도 남양주시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 ⓒ 남양주 소방서


청소기 전원 코드에 합선 흔적

남양주소방서는 청소기의 전원선 내 소훼(燒·불에 타서 없어짐)된 피복과 미확인 단락이 발견되고, 주변으로의 연소 확대 흔적이 발견된 점, 주변 내 기타 고의적·기계적·인화적(引火的) 요인에 의한 발화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남양주경찰서의 의뢰로 경기지방경찰청 제2청 과학수사계가 작성한 ‘화재 현장 감식 결과’ 문서에는 화재 원인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과학수사계 화재조사관들은 화재가 김치냉장고 뒤편에 있던 청소기 전원 코드에서 발화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청소기 본체 전원 코드 투입구 옆에 보이는 전원 코드에서 합선 흔적이 관찰됐다는 것이다.

화재조사관들은 합선 흔적과 관련해 평소 청소기 사용 중에 전원 코드가 집기류 등에 접촉되면서 끌어당겨지거나 꺾이는 등의 행위가 반복됐거나 코드 릴(cord reel)에 감기거나 풀리면서 발생할 수 있는 기계적 손상, 제품 결함 등의 원인으로 코드 내부 소선이 끊기면서 형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전원 코드가 반단선(半斷線) 상태에서는 통전(通電)되는 면적이 감소하고 도체(導體) 저항치가 커지면서 국부적으로 발열량이 증가하거나 스파크가 발생해 주변 가연물에 착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5년 전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이 아파트로 이사했다는 이씨는 “생각지도 못한 화재로 인해 모든 게 엉망이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며칠 후 퇴원할 예정이던 아버지는 돌아올 곳이 없어 두 달 더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화재 현장에서 주저앉았던 어머니는 불안 증세가 심해져 신경정신과에 다니고 있다. 이씨는 “사업에 신경을 쓰지 못하면서 운영하고 있는 회사가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고 밝혔다.

불에 탄 청소기 전선에서 합선 흔적이 관찰됐다. ⓒ 경기지방경찰청

“화재 감식 나왔는데 LG 왜 그러나”

이씨는 화재로 인한 피해도 피해지만 화재의 원인으로 지목된 청소기 제조사인 LG전자의 대응에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경찰서 내 화재 감식 전문가들이 ‘청소기 전원 코드에서 발화된 것으로 판단됨’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도 LG전자에서 피해 보상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익명을 요구한 남양주경찰서 관계자는 “화재 원인의 경우 대부분 ‘미상(未詳)’으로 나오는데 이번에는 화재 감식에서 정확한 이유가 나왔다”며 “LG에서 왜 그러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고 밝혔다.

이씨는 “대기업인 LG 제품에서 불이 났을 리 없다는 생각에 중소기업에서 만든 김치냉장고에서 화재가 발생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며 “그런데 현장을 살펴본 소방관이 ‘냉장고가 아니라 청소기 배선이 원인’이라고 해서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소방관이 ‘LG에 전화해서 피해 보상을 받아라’고 조언해줬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LG전자 측에서 경찰서와 소방서를 신뢰할 수 없다며 화재의 원인이 청소기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합의점을 찾을 수 없게 됐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LG전자 관계자가 억울하면 소송을 하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했다. 그는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알고 있다”며 “우리 같은 사람이 소송에 들어가면 버티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대기업의 횡포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LG전자 측은 코드를 꽂아놓은 상태라고 해서 불이 났다는 경찰의 감정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LG전자 관계자는 “반단선이든 단선이든 전류에 의해서 화재가 나지는 않는다”며 “같은 모델 청소기가 2만여 대 팔렸는데 화재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대기전력 상태에서 화재가 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LG전자는 보상과 관련해서는 KB손해보험에서 진행하게 된다고 밝혔다. LG전자는 해당 청소기에 대한 책임보험을 KB손해보험에 가입해뒀다. LG전자 관계자는 “이씨가 개인적으로 가입한 손해보험사에서 보상을 받은 것으로 안다”며 “그 보험사에서 우리 측에 구상권을 청구하면 법인 대 법인 간 사고 원인을 두고 다툼이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4개월 지나 ‘청소기 화재’ 인정하더니…” 

지난해 4월에도 LG전자가 생산한 청소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기도 이천시에 사는 유 아무개씨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할 의류를 보관하던 자택 1층 창고에서 불이 나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게 됐다. 이천소방서의 현장조사 결과, 청소기 내부 PCB기판에서 불이 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LG전자 측은 화재 원인이 청소기가 아니라 현장에 있던 선풍기의 문제라고 반박했다. 4개월이 지난 8월 중순에야 청소기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며 KB손해보험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으라고 했다.

그런데 KB손해보험이 화재 사건과 관련한 법률자문의 결론이라며 보내온 의견서에는 소비자 과실이 80%로 돼 있었다. 유씨는 “80% 과실을 인정하든 소송을 하든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고 말했다. 결국 유씨는 올해 1월 LG전자와 KB손해보험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청소기 내부에 장착된 PCB기판의 절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LG전자에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LG전자 측은 “안전회로가 작동되지 않았는지 의심이 생길 수 있어 보험사로 넘겼는데 고객 과실이 그만큼 인정되기 때문에 80%로 책정한 것이다”며 “사용 후 전원을 끄지 않아 화재가 발생했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LG전자 관계자는 “대기 상태와 같은 낮은 전력에 의해서는 전기적 요인에 의한 화재가 발생할 수 없다”며 “청소기가 작동 중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PCB기판이 화재의 원인이라는 주장 자체가 인정될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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