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린 ‘아세안경제공동체’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송창섭 기자 (.)
  • 승인 2016.05.05 18:02
  • 호수 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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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땅’ 아세안 주목하던 한국 등 해외 기업들, 1년 만에 난관 봉착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수디르만가(街) 남쪽 끝에 위치한 ‘건설청년동상’ 앞. ‘우리가 바로 아세안이다(ASEAN adalah Kita)’라는 글귀가 적힌 커다란 홍보판이 걸려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아세안 10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태국·필리핀·브루나이·베트남·라오스·미얀마·캄보디아)을 단일 시장으로 묶는 아세안경제공동체(AEC)가 지난해 말 공식 출범했다. 2003년 협상 개시 이후 만 12년 만의 일이다. AEC 출범은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아세안 전 회원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AEC가 정상적으로 출범하면, 아세안은 전체 인구가 6억3000만명으로 세계 3위, 전체 국내총생산(GDP)은 2조7000억 달러, 1인당 GDP는 4000달러(이상 2014년 기준)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유럽연합(EU)에 필적할 만한 거대 시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특히 역내(域內) 평균 나이가 29세로 젊은 데다 막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AEC에 대한 세계 각국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기업들이 동남아를 ‘기회의 땅’으로 주목하며 너도나도 진출을 모색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수디르만가(街)의 건설청년동상 앞에 걸린 아세안 홍보판. 지난해 말 아세안경제공동체가 공식 출범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 시사저널 송창섭

그러나 AEC에 대한 기대감은 1년도 채 안 돼 실망 내지는 회의감으로 바뀌는 모습이다. 역내 국가들의 관심조차 지난해 이맘때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출범 전부터 매해 돌아가며 정상회담 등 한 해 600회가 넘는 회의를 열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아세안 관련 회의를 가리켜 ‘세금만 축내는 그들(공무원)만의 잔치’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세안 회원국, 오히려 무역 관련 장벽 높여

다자간 경제 블록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참여를 놓고 회원국 간 이해관계가 나눠진 것도 AEC 추진 동력을 떨어트린 이유다. 여기에 비교대상인 EU에 비해 역내 국가들의 인종·언어·종교가 제각각이라는 점은 AEC의 태생적 한계일 수밖에 없다는 회의감마저 들게 한다. 맏형 노릇을 할 만한 구심점이 없다 보니 역내 경제권 통합으로 가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절대왕정·입헌군주제·사회주의·군부독재 등 정치 시스템이 제각각인 상황에서 하나의 단일 시장을 만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역내 국가 간 경제 규모도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런 상태에서 인적·물적 교류 장벽을 한꺼번에 풀면 회원국 간 갈등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AEC 출범 이후 아세안 회원국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오히려 거꾸로 무역 관련 장벽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공식 출범은 지난해 말에 했지만 세부 규정 수립은 이제 막 시작된 상황에서 자국 산업부터 보호하는 기류가 뚜렷한 것이다. 자국 내의 한국 등 해외 기업과 해외 노동자에 대한 규제가 한층 강화된 것이 단적인 예다. 노동력의 질적 수준이 큰 차이를 보이는 아세안 회원국들은 우선 자국 규정부터 강화한 뒤 후속 조치를 봐가며 단계적으로 문을 연다는 계획이다.

일단 외국인들이 자국 내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에 대한 장벽을 한층 높였다. 쉽게 말해 굳이 사람을 쓸 생각이면 자국민을 우선적으로 고용하라는 얘기다. 단적으로 인도네시아는 지난해 1월부터 나이·학력 제한 및 고용업체 온라인등록제, 외국인을 위한 인니어 시험 등을 도입했다. 태국은 비자런(Visa Run) 제도와 관련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비자런은 비자 만기를 앞두고 이웃 국가로 나갔다 들어오면 다시 비자를 연장해주는 것으로, 오래전부터 관행과 같았던 제도였다. 그러나 관련 규정이 강화되면서 적법하게 취업비자를 받지 못할 경우 최악의 상황에선 강제 추방도 당할 수 있게 됐다. 베트남의 경우 무비자(Visa-free)로 입국한 사람이 재입국을 희망할 경우, 제3국으로 출국한 후 다시 입국 목적에 부합한 비자를 받아야만 들어올 수 있다. 또 비자 발급 시기도 출국일부터 30일 이상 걸린다. 캄보디아도 상황은 비슷하다.

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이 2015년 11월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경제공동체’ 서명식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 EPA 연합


현지 한인 조사 ‘사업장 축소·정리’ 46.2%

인도네시아는 한국인·일본인 등 외국인을 고용할 경우, 직원 한 명당 연간 1500달러에 달하는 돈을 정부에 내야 한다. 그래야만 취업비자가 나온다. 이는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돈이다. 일부 업종은 취업비자 기간을 1년 미만으로 제한하고 있고, 비자 기간 연장에 대한 규정도 대폭 강화했다. 김문환 PT카신도 글로벌 우타마 대표는 “유통 등 서비스 산업의 경우에도 외국인 채용 기준을 강화하고 나섰다. 이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며 AEC 출범 후 더 강화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인도네시아 현지 교민 매체인 ‘한인포스트’가 지난해 조사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거주 한국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는 것 중 ‘비자 취득 문제’가 57.7%로 가장 많았다. 강화된 체류 규정에 따른 향후 계획으로는 ‘사업장을 축소하거나 정리하겠다’(46.2%), ‘근로자를 현지인 중심으로 바꾸겠다’(23.1%)는 의견도 많이 나왔다. 정선 ‘한인포스트’ 발행인은 “경기 침체로 자국 인력과 산업을 보호해야 하는 아세안 국가 입장에서는 이 같은 조치가 당연할 수밖에 없으며, 한국인만 예외규정을 마련해달라고 호소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부디 산토소 인도네시아 자원전략연구센터장도 “아세안 입장에서는 기술이전에 필요한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하곤 일반 근로자의 근무 규정을 강화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규제 강화 정책은 경기가 살아나기 전에는 바뀌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세안 지역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 정부의 정책도 아세안 국가들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최근 아세안 국가들이 자국 내 외국인 채용 규정을 강화하는 데는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중국 경제력도 한몫을 차지한다. 단적으로 중국의 경우, 대규모 인프라 개발 사업에 있어 중국인 현지 채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대규모 건설·토목 사업은 대부분 값싼 일자리로 구성돼 있다. 해당국 정부 입장에서는 일자리를 늘리기 좋은 분야다. 하지만 중국의 대(對)아세안 투자 확대 이후 아세안 국가 내 중국인 불법 노동자가 늘어나 해당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말 인도네시아는 무비자로 근무하던 중국인 31명을 강제 추방했다. 중국 국적을 가진 이들 불법노동자들은 체포 당시 취업비자가 아닌 여행비자를 갖고 있었으며 북부지역 광산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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