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언론·여론 편견에 맞선 힐스버러 희생자 96인 유가족들의 승리
  • 김경민 기자·권석하│영국 칼럼니스트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5.12 17:48
  • 호수 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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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차가운 외면과 경찰 측의 비협조에 맞선 27년간 기나긴 싸움

27년하고도 11일. 지난 4월26일(현지 시각) 열린 힐스버러 참사 진상 규명 재판에서 배심원단이 ‘96명의 생명을 앗아간 1989년 힐스버러 참사는 단순 사고사가 아니라 과실치사였다’는 평결을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사고가 일어났던 1989 당시 17세였던 그레이엄 라이트가 살아 있다면 40대가 됐을 긴 세월이다. 사회의 차가운 외면과 경찰 측의 비협조에 맞서 오랜 시간 진실 규명을 위해 싸워온 유가족들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반백이 됐다.

 

경찰의 무능한 위기 대처 능력에 사망자 증가

 

힐스버러 참사는 축구 경기장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어린 나이의 사망자가 많았다. 사망자 96명 중 10대가 38명, 20대가 40명이었다. 사망자의 80%가 10~20대의 젊은 세대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고 직후 영국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1989년 4월15일 영국 셰필드 힐스버러 경기장 입석 관중석에 지나친 인원이 몰려 96명의 관중들이 압사당했다. 이날 766명의 관중들이 부상당했으며, 300여 명이 입원했다. ⓒ AP 연합

 

사고 현장 영상과 목격자 증언을 종합해 당시의 상황을 분석해보면 이렇다. 축구 경기가 시작하자 뒤늦게 입석 관중석에 축구 팬들이 몰려들었다. 원래는 안전상의 이유로 회전식 개찰구를 통해 한 번에 한 명씩 들어가게 돼 있었지만 병목 현상으로 입장에 정체가 생기자 관중들은 거센 항의를 했다. 관중을 통제하던 경관들은 당시 현장 총책임을 맡은 데이비드 더켄필드(David Duckenfield) 총경에게 “출구 대문을 열어 쉽게 경기장 입장을 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그라운드와 위쪽 좌석 사이의 입석 관중석은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지만 더켄필드 총경은 이후 사태에 대한 고려 없이 출구를 개방해 대규모 관중 입장을 허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문이 열렸고 뒤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관중들로 인해 이미 입장해 있던 팬들이 입석과 그라운드 사이 철조망에 끼여 압사를 하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했다.

 

“남편, 임종 순간까지 스스로를 용서 못해”

 

여기에 경찰의 무능한 위기 대처 능력이 더해지면서 사망자는 증가했다.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위험을 느낀 관중들이 그라운드 광고판을 뜯어 부상자 이동을 하려 했지만 경관들이 상대 팬들과의 불상사를 염려해 못 가게 막기도 했다. 부상자들이 병원에 못 가고 그라운드에서 숨을 거두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사고가 그렇듯 이 사고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놨다. 사고 당시 15세에 불과했던 케빈 타이럴(Kevin Tyrrell)에게 힐스버러에서의 경기는 생애 첫 원정 경기였다. 그의 아버지인 프랭크 타이럴은 법정 진술에서 “축구 경기를 보러 간 아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케빈과 동년배였던 필립 스틸(Philip Steele)의 아버지 레스는 당시 아들 필립과 함께 힐스버러 구장에 경기를 보러 갔었다. 필립의 어머니 덜로리스 스틸은 “남편은 2001년 사망하는 순간까지 아들을 살리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했으며 끝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폴 카라일(Paul Carlile·당시 19세)의 가족도 슬픔과 자책 속에 살아가고 있다. 폴은 사랑이 넘치는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그의 누나 도나 밀러는 “힐스버러에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사고를 당하던 그날은 그의 사촌누나였던 안젤라의 21번째 생일이었다”고 말했다.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고 안젤라의 생일파티는 중단됐다. 사고가 났던 주 목요일은 카라일의 첫째 누나 미셸의 21번째 생일이었는데, 그날 힐스버러 구장이 위치한 셰필드에서 카라일의 시신이 왔다. 미셸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생일파티를 한 적이 없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을 겪어야 했던 힐스버러 참사 유족들 앞에는 더 큰 고난이 남아 있었다. 힐스버러 구장의 안전을 담당했던 경찰 측이 ‘관중 부주의’ ‘훌리건의 통제 이탈’ 등의 오명을 씌워 단순 사고사로 사건 조사를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사우스요크셔 지방 경찰은 이 참사를 “술 취한 리버풀 팬 폭도 5000명이 경기장에 난입해 벌어진 사고”로 규정하고 상부에는 “술에 취한 리버풀 팬들이 입장권도 없으면서 문을 부수고 난입했다”고 보고했다. 조직적 증언 조작 및 은폐 압력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에게 사고를 초래한 훌리건이라는 오명까지 더해진 상황이었다. 유족들은 참사 피해자에 대한 영국인들의 편견과도 맞서 싸워야 했다. 당시 영국인들은 ‘리버풀 팬들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하다’는 편견이 어느 정도 있었다. 1970~80년대 영국 축구계에서 리버풀 훌리건들은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경찰의 진실 은폐와 일부 언론의 왜곡 보도로 여론마저 희생자 유족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가장 구독자 수가 많은 대중지 ‘더 선(The Sun)’은 참사 이후 “인간쓰레기(the scum)인 리버풀 팬들이 만취한 상태로 경기장 문을 부수고 난입해 사건을 키웠다. 시체에서 지갑을 빼내는가 하면 경찰을 발로 차고 구호작업을 방해했으며 심지어는 방뇨까지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1면에 내보내기도 했다.

 

여느 유족들처럼 폴의 가족들은 세상을 떠난 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싸웠다. “폴은 법을 잘 지키는 아이였다. 그는 훌리건도 주정뱅이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캠페인 활동과 투쟁이 있었다. 저와 폴의 식구들은 다만 폴을 지키기 위해, 그 아이의 편이 돼주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해왔다. 그게 사랑하는 폴을 위해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힐스버러 참사의 희생자 그레이엄 라이트의 형 스티븐 라이트가 지난 4월26일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들은 불법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배심원 평결이 나온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P 연합

 세월호 유족들 힐스버러 유족들 만날 예정

 

유족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보상으로 1000~3500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250만~700만원)를 받았지만 이를 모두 법적 투쟁 비용으로 썼다. 유족들은 진실 규명을 위해, 잊히지 않기 위해 캠페인, 언론 보도, 의회 발언 등 합법적이고 온건한 방식으로 꾸준히 활동해왔다. 리버풀 팬들도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의 지원군이 돼줬다. 희생자 가족 대표는 판결이 나오던 날 리버풀 시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세상이 우리들로부터 등을 돌렸었다. 언론은 물론 제도권도 모두 우리로부터 등을 돌린 와중에도 오직 우리 리버풀 시민들만이 우리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리버풀 시민들께 감사하고 그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은 우리를 언제나 믿어줬다. 우리는 역사의 한 쪽을 바꿨다. 이것이 96명이 남긴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힐스버러 유족들의 끈질긴 투쟁이 일궈낸 성과와 그간의 스토리는 곧 전 세계로 퍼졌다. 힐스버러 유족들의 이야기는 세계 각지에서 그들과 비슷한 아픔을 겪어온 이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된 셈이다. 한국의 세월호 참사, 스웨덴 에스토니아호 참사(1994년 발트해에서 여객선 에스토니아호가 항해 6시간 만에 침몰해 852명이 사망) 외에도 재난 피해 유족들이 힐스버러 유족들과 만나 진상 규명 운동과 유족들의 치유·회복을 위한 추모 사업 문제 등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세월호 유족단체인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 대표자들은 5월3일부터 15일까지 독일과 바티칸·벨기에·영국·프랑스를 방문해 유사한 재난 사고 유가족들과 만남을 갖는다. 특히 영국을 방문해 힐스버러 유족들과 만나 아픔과 연대 의식을 공유할 예정이다. 유가족단체인 416가족협의회는 “유사한 경험을 가진 유가족들이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활동을 공유하는 이번 만남은 향후 연대 사업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그레이엄은 17세였습니다. 그는 웃음이 많고 낙천적인 ‘미스터 해피’였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어떤 부탁도 마다 않고 ‘네 알겠어요’라고 대답하던 그레이엄의 모습을 종종 추억하십니다. (사고) 당시 그레이엄의 여자친구였던 재닛은 지금도 그의 묘에 찾아가 꽃을 두고 옵니다.”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 그레이엄 라이트(Graham Wright)의 형 스티븐 라이트(Stephen Wright)의 힐스버러 참사 진상 규명 재판 진술

“폴라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딸로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우리는 늘 함께 축구 경기를 보러 다녔어요. 사고가 있던 날 경기는 입장권을 한 장밖에 구하지 못했고, 우리 형제들은 한 장뿐인 표를 막내 동생 폴라에게 양보했죠. 저는 요즘도 ‘그때 내가 같이 경기를 보러 갔다면 폴라가 살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희생자 폴라 스미스(Paula Smith)의 오빠 월터 스미스(Walter Smith)의 힐스버러 참사 진상 규명 재판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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