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개 끌리듯 끌려가는 것, 신문에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6.05.17 11:23
  • 호수 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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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눈 감고’, ‘귀 닫은’ 언론

“광주사태는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악화되는 조심이 보였다…(중략)따라서 생활고와 온갖 위협에 시달리는 시민을 구출하기 위해 군 병력을 광주에 투입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한국방송(KBS)의 보도 내용이다. 학생·시민에 대한 계엄군의 발포와 무차별 폭행 등 군부가 저지른 반인권적 행위는 삭제된 채 보도됐다. 이는 1979년 ‘12·12사태’를 통해 권력을 쥔 신군부가 언론 검열을 강화하며 벌어진 일이었다. 

 

KBS뿐 아니라 타 방송사, 지역 언론과 중앙일간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언론은 모두 이 문제에 침묵하거나 정부 발표 자료에 근거한 왜곡된 보도를 일삼았다. 5·18기념재단이 발간한 ‘5·18 왜곡의 기원과 진실’은 당시 왜곡된 보도 상황을 잘 보여준다.

 

 

언론에 묘사된 광주, ‘무법자의 도시’

 

이 자료에 따르면 5·18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광주의 지역 언론은 이 사안을 그나마 먼저 보도했다. <전남일보>의 5월 19일자 사회면에는 ‘비상계엄령 전국으로 확대’ 등 광주항쟁과 관련된 내용이 일부 등장한다. 광주항쟁을 직접적으로 보도한 것은 5월 20일자 사회면에서다. 해당 언론은 ‘광주학생 소요…관련자 167명 석방’이라는 톱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5월 18일 자행된 군의 반인권적 시위 진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 ‘일부 부상자는 군에서 치료하고 있다’는 등 군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다른 지역신문 <전남매일>은 20일까지 광주항쟁 관련 소식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지역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광주MBC>는 상황 발생 하루 뒤인 5월 19일 밤에서야 계엄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 보도한다. 내용은 이랬다. "광주시내 소요사태와 관련해 단 한명의 학생이나 계엄군은 사망한 바가 없음을 분명히 밝혀드립니다. 일부 학생들이 소요를 벌일 경우, 시민 여러분은 상점의 문을 닫고 출입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5월 민중항쟁사료 전집’에 따르면 방송이 나간 시점은 이미 최소 10명 이상의 시민이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뒤였다.

 

중앙 일간지는 한술 더 떴다. 5·18 이후 3일이 지난 5월 21일에서야 보도를 시작했다. 내용은 사실과 정반대였다. 광주항쟁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왜곡했다. <동아일보>는 5월 22일자 1면 톱기사에 '데모대가 공포 쏘자 시민은 귀가했다', '(데모대)기관총 소총 수류탄 실탄 등 다수 탈취'와 같은 내용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5월 27일 ‘혼미…광주사태 10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광주에서 괴한에 의한 살인이 일어났다’고 덧붙이는 등 광주에 ‘무법자의 도시’ 이미지를 덧씌웠다.

 

언론은 5·18에 대한 잘못된 소문도 사실인 양 실어 날랐다. 이는 정부가 광주항쟁 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 언론들은 ‘광주항쟁이 북한군, 북한군 간첩이 주도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보도했다. 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광주항쟁을 연계시키기도 했다. 1980년 7월 3일자 <서울신문>1면 톱 보도를 보면 ‘김대중으로부터 5백만원을 받아 사태(광주항쟁)의 발단을 일으킨’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후 이 두 가지 소문은 정부기관에 의해 ‘사실무근’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극우세력의 끊임없는 의혹제기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정권의 시녀된 언론…“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물론 당시 신군부의 ‘보도지침’과 ‘검열’에 저항한 언론인도 있었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 기자들은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신군부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 국내 언론은 무기력했다. 권력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며 ‘침묵의 동조자’ 역할에 그쳤다. 이 때문에 당시 5·18의 진실은 외신과 시민이 직접 작성한 유인물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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