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의욕 충만한 YS 넘친 자신감이 때론 장애
  • 박관용 前 국회의장│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20 16:20
  • 호수 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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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 실시 등 많은 치적 빛바래

YS의 직설 화법은 민주화 투쟁을 하던 야당 시절엔 매우 효과적이었다. 국민들에게 핵심 주제어만 전달되면 됐다. 어색한 문장이나 적절치 않은 어휘는 출입기자들이 알아서 다듬어 주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정은 YS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1983년, 군사정권이 YS의 단식투쟁 관련 보도를 강력히 통제하자 ‘재야인사의 식사 문제’라는 억지 명칭을 붙여서라도 국민에게 알린 언론이었다. 그러나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대통령은 다르다. 과거와 달라져야 했는데 그게 여의치 않았다. 

 

참모가 보충 설명을 하거나 해명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거듭하면 곤란하다.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 북송 문제처럼 아예 거둬들이기 어려운 ‘엎질러진 물’의 경우까지는 아니라도 필요 이상의 긴장이나 오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면서 ‘가진 자를 고통스럽게 만들겠다’는 발언은 대표적 사례다. 외교안보 부문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국가원수로서, 상대가 우리 국민이 아닌 국가이고 보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임기 2년 차인 1994년 3월 제주 감귤농장을 방문한 대통령(왼쪽 사진)과 임기 5년 차인 1997년 8월 송유관 준공식에 참석한 대통령. 같은 YS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전혀 다르다.ⓒ 시사저널 고성준

 

실언도 애교(?)…그래도 대통령은 달라야

 

“강간(관광)도시, 걸식(결식)아동, 애무(외무)장관 등이야 경상도 식 어투였고 차라리 애교였다. 전봉준 장군을 정몽준 장군으로, 페널티킥으로 올림픽 진출이 확정됐을 때 코너킥으로, 일본 리쿠르트 스캔들을 요구르트 스캔들로 발언한 것 등도 마찬가지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 대목에서 막히자 ‘차씨’라고 호칭한 것은 재치라고 하면 재치다. (청와대를 떠난 후 일이지만) 단식 중인 최병렬 신한국당 대표를 위문하면서 ‘나도 단식을 해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학실하다’고 했던 말도 ‘이제 단식을 중지하라’는 권유로 새겨들으면 그뿐이다.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언을 새겨듣기는커녕 잡다한 국사(國事)에 짓눌리는 대통령의 말꼬리나 잡으려는 게 옳은 처신은 아니다. 하지만 말이 지나치거나 저의가 드러난다면 다르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칼에 목을 찔리는 테러를 당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위문하면서 ‘나도 초산 테러를 당해봐서~’는 그런 사례다. 70년대 야당 원내총무 시절 테러를 당했던 YS는 박정희 대통령(PP) 정권의 하수인이 자신을 테러했다며 기회가 닿는 대로 비난했었다. 그런데 PP의 딸을 문병하면서 ‘초산 테러’를 거론한 것은 참 ‘거시기’하다.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향해 ‘칠푼이’로 매도한 것도 그렇다. 아들 현철의 국회의원 공천 탈락과 무관치 않았기에 곱게 보이지 않는다.” 

 

(악의적으로 욕하는 패들이야 차치하고) 여러 사람들이 YS의 발언을 흉보는 것은 단순히 정제되지 않은 ‘언어’의 문제라서가 아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빚어질지 모를 무리한 일처리 우려 때문이다. 최고권력자가 사적 감정이나 이해에 따라 치닫는다면 어느 누가 카리스마가 넘치는 최고지도자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모험을 하겠느냐는 반문이다. 이런 게 거론될 때 정치평론가들 시선이 일제히 향하는 곳이 ‘현철과, YS의 현철 비호’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조차 이 부분에선 입을 다문다.

 

YS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문민(文民)정부’. 평생 추구한 ‘군정종식’과 ‘민주’를 발전적으로 아우르는 데 문민정부는 ‘딱’이었다. “문민정부라는 명칭이 회의에서 정식 논의된 게 아니다. YS가 김정남 교육문화수석비서관 등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박관용 실장의 전언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본인은 장관 취임 첫 독대(3월2일)할 때 “새 정부 명칭에 숫자를 붙이는 관행은 끝냈으면 좋겠다”고 건의한 게 전부라고 했는데 YS에겐 군사정권과의 고리를 끊으면서 자긍심을 살릴 절묘한 힌트가 됐음 직하다(헌법 개정을 기준으로 전두환 정부는 5공, 노태우 정부는 6공이었으니까 관행대로라면 새 정부 역시 6공이다). 

 

이 ‘문민’이 하나회 숙청을 시발로 하여 ‘5·16은 혁명이 아닌 정변 내지 쿠데타’로, 5·18 특별법 제정으로, 또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구속으로 이어진다. 금융실명제가 한갓 경제혁명이 아닌 정치혁명이 되는 것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사회를 주물렀던 군부와 TK(대구·경북)의 기득권(자본과 요직)을 부수기 위한 측면 때문이다. 이외에도 지방자치제 전국실시 등 YS의 개혁 의지는 확고했으나 그 많은 과제를 5년 단임대통령이 해내려는 것은 과욕이었다. 박관용 실장의 회고처럼 정부조직 개편조차 임기 2년이 됐을 때 일부나마 겨우 이뤄졌다.

 

“5개 분과위로 구성된 YS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대선 공약과 정부 부처 보고를 취합해 넘기면 행정실(실장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이 이를 최종 정리해 당선자에게 보고했다. 인수위 구성이나 ‘100일 계획’도 미국에서 따온 것이다. 위원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위원들이 YS계가 아닌 민정계였다. 때문인지 실무적 역할에 그쳤다. 새 정부가 출범 100일 동안 우선적으로 다룰 정책 과제를 정리한 게 ‘100일 계획’이라지만 사실 구체성은 별로 없었다. 중요 어젠다를 뽑아 열거한 정도다. 실제 추진과정에서 보니 프로그램대로 되는 게 많지 않았다. 이를 맡아 추진할 장관들의 생각도 다르고 수석들도 바뀌니까 그랬다. 정부조직 개편도 국회가 시비를 거는 바람에 다음 해 12월에나 가능했다. 인수위가 너무 욕심을 내서는 곤란하다. 정책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선이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대통령이 의욕을 갖고 있어 여러 개혁 과제를 과감하게 추진하기는 했지만 무리가 없을 수 없다. 예산이 수반되고…. 인왕산 개방-청와대 앞길 통행 허용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간단한 과제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박관용 초대 비서실장의 솔직한 토로다.

 

인수위원·민자당 총재 비서실장을 거친 김한규 총무처 장관(1996년 12월 임명)은 “3년 전 인수위 때 논의된 사항을 점검했더니 상당부분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 안됐더라”고 술회했다.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니 제대로 실현된 게 없었다. 대통령도 (어떻게 추진되는지) 몰랐을 것이다. 5·18 특별법도 단적인 예인데 법만 만들었지 후속조치가 없었다. 예산이 수반되는 게 아닌 공무원시험 평일 실시 하나도 간단치 않은 게 국정이다.”

 

TK의 집단 반발이 YS 침몰 재촉

 

YS의 임기 3년차 지지율은 첫해의 4분의1에도 못 미치는 20%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회창 전 총리를 영입하는 등 전열을 정비해 1996년 15대 총선을 가까스로 치러냈다. 서울에서 27석을 확보해 국민회의(18석)를 누른 것은 최대의 성과였다. 지지율도 40%대로 반등시켰다. 그러나 299석 중 139석에 그치는 여소야대 정국의 올가미는 그의 목을 죄었다. 무엇보다 대선에서 자신에게 패한 뒤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DJ) 총재의 국민회의(79석)와 자신이 팽(烹)시킨 김종필(JP) 총재의 자민련(50석)의 상승세는 치명적이었다. 제일 경계한 DJ의 대통령 취임을 가능케 한 DJP연합을 태동시킨 선거였기 때문이다. 자민련의 비약은 YS가 단행한 전·노 두 사람 구속에 대한 TK의 집단 반발 결과라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기도 하다. PK(부산·경남)가 중심이 된 YS의 민주계는 집권하자마자 요직을 장악한 TK를 몰아냈고, 대폭 물갈이 대상이 됐던 TK는 들끓었었다. 여기에 전·노 두 사람의 구속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고 이들이 자민련에 대거 가세했다. DJ-JP연합군에 밀리던 YS는 이듬해 1월 아들에 대한 검찰수사와 구속으로 기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랬으니 임기 5년 차 YS는식물 대통령이었다. 말이 국정의 중심 청와대지, 찾아오는 이 없는 외딴집이었다. “대통령 임기 만료 3개월을 남긴 어느 날이다. 오후 6시, 하루가 지났나 싶었는데… 갑자기 멍해졌다. 아침 8시 출근 이후 그 시간까지 단 한 통의 전화가 없었던 사실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과거 청와대의 경제수석을 역임했던 P씨의 회고다. 

 

권력의 속성이라는 게 본래 그렇고 그렇다지만 ‘권력의 말년(末年)’은 정말 썰렁했다고 한다. 레임덕(lame duck)이 아니라 ‘데드덕(dead duck)’이라는 얘기다. 달리 갈 곳을 못 정한 비서관 정도나 남아서 수군대는 곳이 임기 말 청와대다. 너나없이 ‘청와대 탈출’에 바쁘다 보니 적막강산이 된다. 일반 정부 부처 고위 공무원들이 차관 승진을 저어하는데 청와대라고 하등 다를게 없다.

 

“퇴임을 20여 일 남긴 2월2일 YS의 초대를 받고 청와대 상춘관에서 저녁을 들었다. 김덕룡·이경재·오인환·이명현 등 전직 수석·장관들이 함께했다. YS는 몹시 외로워 보였다.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떠나버린 청와대 넓은 관저에 노부부만 덩그렇게 남아 있으면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고 했다.” YS 임기 첫해 경질됐던 한완상 전부총리가 털어놨던 일화다.

 

 

1975년 5월21일, 박정희 대통령과 여야 영수회담을 마치고 청와대를 나서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 총재는 48세, 박 대통령은 열살 위인 58세 때다. ⓒ 시사저널 고성준


中情이 야당 정치인 ‘돈·여자’ 스캔들 흘려

YS가 민주화 투쟁에 올인하던 1960~70년대, 야당 의원은 민주주의만 외치면 됐다. ‘민주(民主)~’면 대충 통했다. 여기에 정부 여당의 비리나 스캔들을 곁들이면 국민들은 박수를 보내줬다. 의원들 상당수는 공부를 안 했다. 비서가 적어주는 연설문과 질문지로 연명(延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써준 원고도 제대로 읽지 못해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행여 실수할까 봐 ‘APT(아파트)’라고 써 준 대목을 ‘에피티 아파트’라고 읽어 내린 H 의원, ‘口頭禪’을 ‘구두탄’으로 읽은 M 의원 일화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연설문 원고에 ‘(책상을 치면서)’라고 부기(附記)된 것을 ‘괄호 열고 책상을 치면서 괄호 닫고’라고 읽는 의원님도 계셨다. 단 한 번이라도 미리 훑어봤다면 없었을 해프닝들은 숱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정치 인생 시발도 비서관이었는데 그처럼 실력을 인정받아 금배지를 단 비서 출신들은 김태식·김덕규 전 국회부의장 등 다수다(박 전 의장의 경우 친구인 이기택 의원의 ‘배지는 내가 달았지만 우리가 반반씩 나누어 달았다고 생각하고 도와 달라’는 요청에 따라 비서가 됐다. 당시 야당의 정치지망생들이 밟는 경로는 실력자 비서나 당료(黨僚)가 돼 의원들 뒷바라지하며 때를 기다리다 공천을 따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보면 야당 의원들은 형편없는 ‘정치꾼’이 되는데 물론 그렇지 않다. 당시의 야당 의원들은 오히려 그나마 민심 소재를 알리는 ‘정치가’로 인식됐다. 알량한 지식이야 여당 의원들이 몇 수 위일지 모르나 그들 대부분이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거수기(擧手機)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후한 점수를 받았다. 특히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던 유신(維新) 시절의 여당 의원은 ‘정무직 공무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권 회유 및 윽박을 전담하는 중앙정보부(中情)가 야당 의원들의 비리를 흘려도 귓등으로 넘기는 국민들이 많았다. 

 

中情은 최우선 표적인 YS에 대해 무수한 비판과 조롱거리를 생산해냈다. 中情이 정치인을 휘어잡는 전가보도(傳家寶刀)는 돈과 여자. 中情은 돈에 깨끗한 YS에 대해선 ‘여자’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는, 그 이상의 국민적 이해가 따랐고 그래서 흠집 내기 음모는 먹혀들지 않았다. YS가 돈 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게 전혀 없지는 않다.

 

박정희 대통령(PP)과 정면 대결하던 1975년, 신민당 총재 YS는 월남 패망으로 안보불안이 고조되자 패망 3주 뒤인 5월21일 PP와의 영수회담에서 국정 운영 협력에 합의했다. 대여 공세 고삐를 늦춘 것이다. 이때 ‘YS가 PP에게서 거액을 받아 챙겼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돈 봉투의 액수를 확인하느라 일부러 남산을 한 바퀴 돈 뒤 귀가했다’는 등 그럴싸한 얘기들이 퍼졌다. 中情이 흘린 것을 YS의 당내 경쟁세력이 부풀렸다는 등 설이 분분했는데 결국엔 ‘치사하다’는 비웃음만 여권에 안겨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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