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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에 루주 바른 사진’ 프랑스 정계 발칵 뒤집다

보팽 녹색당 의원, 여성 8명 성추행 파문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27(Fri) 06:50:52 | 13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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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이제 DSK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2011년 5월 1일 장피에르 라파랑 전 총리는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DSK라는 이니셜로 불렸던 정치 거물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국제통화기금) 총재의 성추문 스캔들이 터진 직후였다. 정치인의 사생활 문제에 대해선 철저히 입을 닫았던 프랑스 정계와 언론에 대변혁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 정치권은 다시 성추문 파문에 휩싸였다. 이번 사태의 주인공은 프랑스 하원의 드니 보팽 전 부의장이다. 

 

지난 5월9일, 라디오 방송 프랑스 앵테르는 드니 보팽의 성추행 전력을 보도했다. 그가 적(籍)을 두었던 유럽생태녹색당(EELV) 소속 4명의 피해 여성이 공개 증언에 나섰다고 밝혔고, 이외에도 신원을 공개하지 않은 4명의 피해자가 더 있는 것도 확인됐다. 성희롱 문제에 대해선 입을 닫아왔던 프랑스 정가에서 피해 여성들이 공개 증언에 나서자 이번에는 전직 여성 장관들이 지원에 나섰다. 5월16일, 17명의 전직 여성 장관들이 공동 성명을 발표하며 규탄에 나선 것이다. 사건의 후폭풍이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은 DSK 사건 이후에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봐도 무방하다.

 

 

성추문 논란에 휩싸여 물러난 드니 보팽 전 프랑스 하원 부의장.

 

전직 여성 장관들 “정치권 성희롱 안 참겠다”

 

이번 사태를 폭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탐사보도 전문매체인 메디아파르였다. 르몽드 편집장을 지낸 에드위 플라넬이 이끌고 있는 이 매체는 ‘확실한 독립성’을 위해 유료 인터넷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다. 플라넬 편집장은 이번 사태에 대해 “다른 부패 사건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감추어져 있던 것으로부터 끄집어내야 했다”며 공론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플라넬 편집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번 사건에 대한 취재는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디아파르 나익 브루두 기자는 유럽생태녹색당 내부의 성추행 관련 정보를 인지한 상태에서 취재를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앵테르의 시릴 그라지아니 기자도 다른 경로를 통해 이 사건을 인지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의 개각에 관해 취재하던 중, 녹색당 계열에서 왜 드니 보팽이 입각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취재하던 중 보팽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번에 공개 증언에 나선 피해자 중 한사람인 상드린 루소 의원에 따르면, 2011년 10월 드니 보팽의 성희롱 시도가 있었던 당시, 그 사실을 주변에 말했을 때의 반응은 “또 시작이군”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방증인 셈이다. 다른 피해 여성인 이자벨 아타르 의원은 2011년에 수개월에 걸쳐 음란 문자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2013년 여름 마르세유에서 있었던 당 행사를 다녀와서 피해자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당시 피해자들은 모두 고용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피해자가 적지 않았음에도 하나같이 증언에 나서는 것을 기피한 것은 언론에 노출되면 불이익이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세실 뒤플로 의원은 “성희롱 사실을 말한 피해 여성의 85%가 그 자리에서 떠났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 후 익명의 여성 정치인은 “지금은 영웅이지만, 이제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자벨 아타르 의원은 “증언에 나선 피해자들이 서로를 모르고 있었다”며 “나 혼자였다면 절대 증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이번 사태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계기는 사진 한 장이었다. 지난 3월8일, 여성의 날을 맞아 프랑스 하원의 남성 의원들은 입에 붉은 루주를 바른 사진을 트위터에 게재했다. ‘성추행, 성희롱 추방 캠페인’이었다. 이 사진에 등장한 인물 중에 바로 드니 보팽 부의장이 있었고, 상드린 루소와 같은 피해자들은 이것을 보고 격분해 전격적으로 공개 증언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아타르 의원은 “이번 사태 8명의 피해자를 넘어서 모든 피해자들에게 ‘침묵의 금기를 깨라’는 것이 우리가 주고 싶은, 이번 사태가 주고 있는 메시지다”라고 덧붙였다.

 

반(反)여성폭력운동연합의 마릴린 발텍은 “피해 여성들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모두 나름대로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자리의 인사들이 행동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는 사이에서 가해자가 살아남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가해자들은 환자라기보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것”이라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니 보팽 전 프랑스 하원 부의장이 3월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자신의 SNS에 올린 사진. 남성 하원의원들이 입술에 붉은 루주를 바르고 있는데, 이는 성추행 추방 캠페인을 뜻하는 것이다. 이 사진에 역겨움을 느낀 피해자들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녹색당 집단 탈당으로 원내 정당 입지 상실

 

그렇다면 ‘인권의 국가’ 프랑스의 정치권에서 이러한 성희롱 파문이 잦은 이유는 무엇일까. 세바스티앙 드나자 사회당 의원은 “남성 정치인과 여성 부하 직원의 종속관계라는 정계의 특수성에 있다”라며 “의원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의회와 계약하는 직원은 일반단기계약직(CDD)보다 훨씬 심한 고용 불안정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덧붙였다. 여성으로서 프랑스 경제인연합회인 메테프의 회장을 지낸 바 있는 로랑스 파리조는 이번 사태에 대해 “정계의 인사들에게선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지적하며 “아무래도 권력과 힘의 대결이 집약된 곳이기 때문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기업 내부의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대해서도 과거보다 더 심각해졌으며, 법적 제재나 체계에 있어서도 영미권에 10년 이상 뒤처져 있다고 인정했다. 

 

이번 사건이 터진 후 보팽 전 부의장은 다각도로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4월8일 메디아파르에 변호사 명의의 서한을 보내 취재를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으며, 마찬가지로 4월26일 프랑스 앵테르에도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낸 것이 밝혀졌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유럽생태녹색당은 원내 정당의 입지를 잃었다. 5월19일 6명의 의원들이 집권당인 사회당으로 당적을 옳긴 것이다. 최소 15명의 의원이 있어야 원내 정당으로 인정해주는 프랑스의 의회에서 녹색당은 성추문 스캔들로 당의 입지마저 흔들리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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