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원작보다 나은 번역판
  • 박영철 편집국장 (everwin@sisapress.com)
  • 승인 2016.05.30 07:34
  • 호수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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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호 시론 원고를 보고 제 칼럼과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구나 싶어 좀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접근방식이 다른 것을 알고 소재를 바꾸지 않고 계속 쓰기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5월17일 아침 출근길의 일입니다. 지하철 안에서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켜고 뉴스포털에 들어갔습니다. 특이한 뉴스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국 시각으로 이날 새벽 3시 런던에서 한강이라는 작가가 맨부커상이라는 상을 받았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제 소감은 이랬습니다. “한강이 누구지? 이름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맨부커상은 또 뭐야?”

 

 

한국 언론 이럴 때 빠르죠. 속보(續報)가 쏟아졌습니다. 작가 한강이 누군지도 알게 됐고 맨부커상이 어떤 상인지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책이 매진됐다는 뉴스를 보곤 서점행은 포기했습니다. 이틀 지난 5월19일 서점에 가서 이 책을 샀습니다. 밤새 찍어냈는지 책이 많이 진열돼 있더군요.

 

 

소설책을 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사회생활 시작 후 오랫동안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 서적 같은 실용서 위주로 책을 읽고 살아온 탓에 소설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고 스스로 변명성 분석을 해봅니다.

 

 

이 글을 쓰려면 작품을 읽은 후 해야 하는 까닭에 열심히 읽었습니다. 흡입력이 대단한 소설이더군요. 처음엔 대단하다는 걸 잘 못 느끼다가 어느샌가 주인공의 말과 행동이 남이 아닌 내가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책을 읽다 보니 저절로 반성도 하게 됐습니다. ‘꼭 해외에서 알아줘야 관심을 갖느냐?’ 하는 점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인 문학작품 후보가 많습니다. 위대한 문학은 시대의 고통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끔찍한 기억인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한국전쟁, 베트남전, 광주민주화운동 등은 아이러니하지만 훌륭한 문학적 소재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습성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풍토를 바꿔야 진정한 광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고 번역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설국(雪國)>은 번역의 힘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영어 번역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영어판이 원작보다 낫다는 평가가 통설입니다.

 

 

<천일야화(千一夜話)>로도 불리는 <아라비안 나이트>는 전설적인 번역자 리처드 버튼 경(卿)의 영어 번역이 없었더라면 인류문화유산 수준으로 보급되진 않았을 거라는 게 중론(衆論)입니다.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은 오래전부터 친일파·친중파 외국인 마니아가 많았습니다. 뛰어난 번역가가 많이 배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작입니다. 걸음마를 잘 떼려면 우리가 우리 것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제일 중요합니다. 번역도 창작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고 장려하는 시스템도 구축해야겠습니다. 친한파 외국인들이 원작보다 나은 번역판을 다수 만들어내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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