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십자군 격퇴하고 이슬람 수호한 쿠르드의 영웅
  •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02 21:38
  • 호수 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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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이슬람 제국에서 용맹하고 지혜로운 군주로 각인

7세기 초반 발흥한 이슬람은 급속하게 팽창해 유럽까지 확장했지만 10세기 이후 약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봉건제 질서로 안정된 유럽은 역량을 축적하고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으로 십자군을 조직해 공격에 나섰다. 초기에 지리멸렬하던 이슬람 세력에 살라딘이라는 탁월한 군주가 출현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십자군을 막아낸다. 지금도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터키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쿠르드 민족 출신의 살라딘은 이슬람 영웅 중에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거부감이 적다.

 

610년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래 후계자 칼리프들이 세운 이슬람 제국은 대외정복을 시작해 서쪽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프랑스 지역까지 진출한다. 732년 프랑스 중서부 투르에서 샤를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 군대가 이슬람 군대에 승리하면서 피레네 산맥이 서쪽의 경계선으로 굳어졌다. 동방에선 동로마제국의 후예 비잔틴제국이 이슬람의 공격에도 버티면서 동쪽의 경계선이 됐다. 중부 유럽의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로 분화되면서 종교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세력권으로 확립됐다. 초기에 세속군주의 군사력에 의지해 권력을 유지하던 교황은 중세를 거치면서 교황령이라는 자체 영토, 막대한 토지를 보유한 교황청 직속 수도원을 관할하는 권한에 신자들의 헌금이라는 안정된 수입이 뒷받침돼 종교적 권위에 세속적 권력까지 확보하게 됐다. 교황과 세속군주 간의 대립은 1076년 밀라노 주교의 임명권을 둘러싸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 간의 분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교황이 황제에게 종교적 사형선고인 파문을 결정하자 황제가 추운 겨울에 교황 별장까지 달려가 사흘간 밤낮으로 사죄해 용서를 받았다.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내부의 적을 평정한 그레고리우스 7세를 이어 교황이 된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를 열어 이슬람이라는 외부의 적을 평정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자는 명분을 내걸었다. 교황이 직접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분위기를 고취시키자 이듬해인 1096년 1차 십자군이 조직돼 원정에 나섰다. 당시 아랍 지역의 아바스 왕조가 후반기에 들어서 약화된 상태에서 1차 십자군은 대성공을 거둬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터키에서 팔레스타인 해안을 따라 아르메니아·안티오크·트리폴리·예루살렘의 4개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반격에 나선 이슬람 군대가 실지(失地)를 회복하자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주축이 된 2차 십자군이 1147년 파병됐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87년 예루살렘이 이슬람 군대에 재함락되자 충격에 빠진 유럽은 1189년 3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등 유럽의 정예 병력을 모두 집합시킨 최강의 전력이었다. 살라딘은 2차, 3차 십자군전쟁에서 이슬람 군대를 이끌고 십자군을 패퇴시킨 최고지휘관이었다.

 

살라딘, 2·3차 십자군 패퇴시킨 최고사령관

 

유럽인들에게 살라딘이라고 불리는 살라흐 앗딘은 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시리아 지역의 실력자였던 부친을 따라 젊은 나이의 살라딘도 전투에 참여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174년 이집트를 지배하던 파티마 왕조 계열의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이집트의 술탄이 돼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했다. 당시 십자군 왕국과 이슬람 세력 간의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상태의 중동에서 살라딘은 군사적 승리를 이어가면서 명성을 높여가던 중 1187년 7월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호수 근방의 티베리아스에서 벌어진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고, 여세를 몰아 3개월 만인 10월에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이슬람 세력 입장에선 88년 동안 기독교도에게 강탈당했던 성지를 회복한 것이고, 기독교 입장에선 천신만고 끝에 수복한 성지를 다시 빼앗긴 셈이었다. 과거 십자군은 이슬람 포로들을 처형했으나, 살라딘은 기독교 포로들을 몸값을 받고 석방했으며, 예루살렘에 살기를 원하는 기독교도들에겐 추가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관용정책을 폈다. 이후 예루살렘은 700년간 이슬람의 통치를 받는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함락에 대응해 파병된 3차 십자군은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났지만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와 이슬람의 살라딘이라는 2명의 스타를 탄생시켰다. 리처드 1세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군사적 역량이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명성이 높았고, 3차 십자군에서도 정예 주력군을 이끌고 있었다. 리처드 1세는 1191년 6월 팔레스타인의 아크네를 함락하고 9월 아르수프에서 살라딘이 지휘하는 군대와 맞붙었다. 리처드가 승리하고 근거지를 확보했지만 전투 과정에서 두 군주는 상대방에게 깊은 신뢰와 존경심을 품게 됐다. 또한 리처드 1세는 동맹군들이 패배하거나 철수하는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해도 고립무원의 상태가 돼 보급단절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살라딘과 협상해 철수를 결정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양대 세계의 영웅이 적으로 맞붙었지만 서로 존경심을 가지고 헤어지는 이야기와 관련해 수많은 일화와 전설이 만들어지고 유럽의 다양한 문학작품에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살라딘은 기독교 세계에서 명성을 얻었고 이슬람 제국의 용맹하고 지혜로운 군주로 각인됐다.

 

 

살라딘 초상화

리처드 1세, 살라딘과 협상해 철수 결정

 

유럽의 입장에서 1089년에 시작해 1272년까지 200년간 8차례 계속된 십자군전쟁은 1차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도 충족시키지 못했고, 대외적 영토 확장이라는 유럽 각국의 실리도 챙기지 못했다. 특히 가장 화려한 진용을 자랑했던 3차는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요란하기만 했지 결과는 초라했다. 그러나 교황권의 절정에서 시작됐던 십자군전쟁의 실패로 교회가 약화되면서 중세 종교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의 시대인 르네상스가 개화됐다. 경제적으론 지중해 무역의 활성화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로마 패망 이후 600여 년간 동부 지중해 무역을 이슬람에 넘겨줬던 기독교 세력은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베네치아가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동서 교역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다. 십자군전쟁 자체는 기독교 세력의 공격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방어가 성공한 이슬람의 우세승으로 종료됐으나, 전쟁에서 촉발된 근대성을 향한 사회변화는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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