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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용 회고록] 맺고 끊는 게 분명했던 YS

‘쉬운 일도 어렵게’ 말하는 DJ와 대비돼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06(Mon) 03:20:22 | 13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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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에게 YS를 평해보라니까 DJ가 답하기를 ‘그는 어려운 일을 너무 쉽고 간단하게 말해’, YS에게 DJ를 평해보라고 하니까 ‘그는 쉬운 일도 괜히 어렵게만 말해’라고 했다.”

 
두 사람의 성격을 단적으로 웅변하는 말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직선제 개헌 1000만 서명 운동’ 때 DJ의 ‘1000만이 될 법이나 하냐’와 YS의 ‘어차피 안 될 텐데 1000만’이라는 두 사람 간의 설전은 전형적 사례다. YS의 경우 ‘이거다’라는 판단이 서면 좌고우면(左顧右眄)않고 돌진한다. 단도직입(單刀直入)이다. 그의 대통령 재임 중 정책 추진 배경이나 모양새는 흡사하다. 하나회 숙청 때처럼 본인의 속이 타 들어갈지언정 내색을 않는다는 얘기다. 

문민시대를 연 김영삼(YS) 제14대 대통령 묘비 제막식이 5월26일 국립현충원 묘역에서 열렸다. 묘소 왼쪽의 ‘김영삼 민주주의 기념비’에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등의 어록이, 측면에는 YS의 ‘民主主義(민주주의)’ ‘大道無門(대도무문)’ 휘호가 각인됐다. 뒷면에는 김정남 교육문화수석이 집필하고 서예가 신두영씨가 쓴 추모의 글이 담겼다. 오른쪽 묘비에는 ‘대통령 김영삼의 묘’라는 비명과 약력 등을 새겼다.


“그렇다고 섣불리 달려든다는 게 아니다. 최종 결심 단계에 이르기 전엔 참모들의 조언을 구하며 따질 것은 철저하게 따졌다. 청와대 입성 전, 야당 투사 시절과 여당인 민자당 대표 때까지 상담역을 맡은 게 ‘좌(左)동영 우(右)형우’의 김동영 의원이다.

김 의원이 책사라면 최형우 의원은 돌격대장인 셈이다. 야당 원내총무로서 거리투쟁에 앞장서기도 하고 얼핏 우직한 모습이어서 ‘불곰’이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상황을 읽는 눈이 밝고 두뇌 회전이 빠른 김 의원은 참모장으로서 YS를 두루 보좌했다. 대선 1년 반 전 숨짐으로써 대중에게선 잊혔으나 실제 그가 YS의 집권에 기여한 부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YS 집권 전 10년의 공만 따져도 대단하다. 5공 당시 야당 세력을 결집시킨 민주화추진협의회의에 동력을 공급한 민주산악회 결성도 그가 주도했다. 

최형우 의원 등 다른 상도동 핵심들의 거센 반발로 망설이는 YS를 설득해 3당 합당의 길로 나서게 만든 이가 당시 통일민주당 부총재인 김 의원이다(김 의원은 민정당과 김종필 총재의 신공화당의 양당 합당이 이뤄진다면 집권 기회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점을 설파했고 YS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김 의원은 특유의 뚝심을 발휘, 상대인 김윤환 민정당 총무와의 담판으로 합당 후의 YS 입지를 다졌다. 두 사람 간의 신뢰는 김윤환 총무가 후일 민자당 대통령 후보 확정 단계에서 결정적으로 편들게 만드는 바탕이었다. 김 총무는 입버릇처럼 ‘김동영이 같은 이가 있기에 오늘의 YS가 있는 것’이라며 김 의원을 치켜세웠다). 

1988년 말 이미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폭탄주까지 마다 않으며 ‘주군(主君)’인 YS을 챙긴 의리의 사나이가 김 의원이다. 김 의원은 정무장관이던 1991년 6월에야 자리에서 물러나 치료를 받다가 2개월 뒤 세상을 떴다. YS가 김 의원 사망 10주기에 참석해 ‘김 의원이 살아있었더라면 정권을 (DJ에게) 놓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한 것은 그의 위상과 역할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상도동 사람들의 일치된 전언이다. 

YS, ‘이거다’ 싶으면 단도직입

“YS는 장황한 설명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보고서도 최대한 간략하게 작성토록 했다. 핵심이 분명하면 YS는 대번 방향을 짚었다. 또 주요 이슈나 정책은 거듭 확인했으나 웬만한 사안은 참모들을 믿고 맡겼다. 그릇이 큰 분이었다.” 

박관용 초대 비서실장의 회고다. 이런 점에서 DJ는 여러모로 대비된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DJ는 마이크로(micro)한, 시시콜콜한 것은 잘 아는데 매크로(macro)한 경제는 모른다’면서 ‘DJ가 건설업자를 만나면 2시간 동안 밥을 먹으면서 건설 관련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묻는다더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DJ를 비판자들은 학력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하는데, DJ의 ‘계속 공부’와 관련한 증언들은 널려 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경주를 방문한 적이 있다. 김해 김씨 시제(時祭)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제 참석 전 유적지를 관광할 때 그의 전문가 뺨치는 지식은 관광안내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아예 안내원 마이크를 건네받아 건축 연대와 얽힌 비화를 소상히 설명했다. 어느 한구석 틀리지 않았다. 전날 밤 동교동 서재에서 관련 책자들을 통독하며 암기했다고 들었다. 이게 아니라도 관심 법안이 있으면 조문 한 구절까지 꿰고 있는 바람에 의원이나 비서들이 머쓱해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DJ의 이런 꼼꼼함은 그에게 빼어난 참모가 드문 것과도 통한다. 본인이 아는 게 많으니 어지간한 참모가 배겨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대신 ‘이런저런 정보’는 반색하니까 부작용도 심심치 않았다. 음해가 상도동 쪽보다 ‘풍성’했던 것도 이런 것과 무관치 않을 터다. DJ 자신이 공작정치에 멍들었던 게 역설적으로 이런 데 취약하게 했을 수 있다.” DJ를 20년 넘게 가까이서 지켜본 언론인의 얘기다. 

그는 “평민당 총재이던 DJ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던 때다. 문병 왔으면 하는 김옥두 비서의 전갈을 받고 병원에 갔는데 환자와는 무관했다(장세동 부장의 안기부는 DJ의 입원이 ‘수금(收金)’을 위한 잔꾀라는 악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당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과격시위 때문에 평민당이 여론에 몰릴 즈음이라 칭병(稱病)한 상태에서 타개책을 모색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전대협과 손을 끊어라. 정말 집권할 마음이 있으면 호남 일색의 조직 구성을 완전 재편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조언을 해줬다. DJ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틀 뒤 퇴원한 그는 즉시 조언 내용을 실천에 옮겼다. 전대협과 결별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어쨌든 DJ의 학습능력은 살만하다”고 했다. 

전날 밤샘 공부한 DJ…‘핵심만’ YS 

YS는 DJ를 늘 거짓말쟁이로 비난했다. 원칙에 집착하는 YS였기에 말 바꾸기를 예사로 하는 DJ를 더 못마땅해 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DJ에게 역전패한 뒤 ‘DJ의 승리가 나의 승리’라며 바로 전국 지원 유세에 나선 것도 원칙을 지킨다는 소신 때문이었다(숙소에선 소리 내어 울었다지만). DJ에 대한 불신은 1987년 대선 때 DJ가 ‘4자(1노3김) 대결 시 (DJ) 필승’이라며 후보단일화를 거부하면서 극에 달했다. YS의 충실한다는 원칙은 박정희(PP) 대통령 서거 때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상도동 가신들과 몇몇 목사들이 말리는데도 청와대에 차려진 빈소를 찾아가 조문했다. 본인이 숨지기 전까지도 용서 않았던 PP였음에도 그랬다. 

“YS는 칼국수, 수제비로는 영양실조가 우려된다는 조언을 들은 체 만 체했다. 설렁탕이 영양식이라고 보면 된다. 와인이 식탁에 오른 것은 출입기자들의 채근 때문에 나온 몇 차례다. 그만큼 엄격했다.” 박관용 실장의 전언인데, 1983년 단식 당시 YS 태도를 보면 알만하다. 전두환 정부는 YS가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며 출국 권유를 거부하자 그를 서울대병원에 강제 입원시켰었다. 그리고는 ‘링거를 맞고 있다. 물에 영양제를 타서 마신다’고 헛소문을 냈다. 그러자 병실 밖에 설치된 수도꼭지 물만 마신 YS였다(원칙과 ‘거리’가 있는 부분은 ‘여자 부문’인데 청와대 입성 후엔 원칙을 지켰다. 사실 DJ도 혼외 딸 문제로 곤욕을 치렀듯이 ‘옛날 사내들’에게 ‘여자’는 공개돼서 이로울 게 없는 정도의 ‘있을 수 있는’ 예삿일이었다. 요즘엔 치도곤 맞기에 십상인 말이지만).

PP 서거로 대통령 자리가 성큼 다가온 것으로 각자 기대에 부풀었던 1980년 4월, YS와 DJ는 ‘유일한’ 경쟁자에게 지는 것만은 참지 못했다. 신문 보도 내용뿐 아니라 크기(단수)도 경쟁거리였다. DJ 관련 보도가 자신보다 이틀 연속 크게 나오자 다음 날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예고했다. 뉴스거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보고를 받자마자다. 그리곤 예정된 회견 당일 YS의 첫 멘트는 “나한테 담배 얻어 피우던 사람(DJ)인데~”였다. 굽을 올린 키높이 구두와 함께 ‘DJ에 대한 호평’이 YS 청와대에서 금기시(禁忌視)된 것은 당연했다.


 

 

김영삼 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지낸 남재희 전 의원. 서울신문 주필 등을 거친 언론인으로서 정계에 진출했던 4선 경력의 남 전 의원은 근대 한국 정치와 사회를 가장 예리하게 파헤치는 것으로 정평 난 ‘진보 논객’이다.

[상자] 보수·진보 아우르려 했던 YS

 

청와대의 주인이 된 YS는 보수·진보를 아우르기 위해 부심했다. 군사독재 정권과 싸워온 명실공한 문민정부의 기수로서 자리매김하기를 고대했던 게 큰 이유였다. 그 자신이 전통야당 구파(舊派) 계열을 잇는 보수 진영에 서 있었기에 한계는 있었으나 진보 그룹을 포용하려는 의지는 분명했다. 물론 진보 인사라고 해도 DJ가 주도하는 신파(新派) 계열의 인사와는 다른 부류가 대상이었다(신·구파를 칼로 금 긋듯이 재단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윤보선 전 대통령의 경우 구파 리더였고, 그 역시 신파인 DJ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1980년 이후에는 ‘재야(在野)’라는 이름 아래 DJ와 정치 행보를 같이했다. 이처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뭉치기도, 등지기도 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출신’에 따라 정치 행보를 달리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특히 소수파인 DJ가 정치적 외연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보수·진보 진영은 재정비된다. DJ가 재야 및 운동권 그룹을 계속 흡수하고, 군사정부에 참여했던 민간인들과 순치(馴致)된 군부 세력까지 YS 진영에 합류하면서 보수·진보 대결 구도는 보다 확실해졌다).

 

이 같은 YS의 의중이 반영된 게 한완상 통일부총리와 김정남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기용이다. 비단 극우(極右) 그룹뿐 아니라 당시 여권 내에서 ‘잠입 좌파(左派)’로 지목하며 우려했던 바로 그들이다. 여기에 또 다른 인사가 있다. YS 정부의 노동부를 맡은 남재희 장관이 그다. 공화당 말기의 10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정당 소속으로 11·12·13대 의원이던 남 전 장관은 외견상 경력만으론 골수 우파지만 이념적으론 좌파(성향)다.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진보 정객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자주 만나는 게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시대 상황을 예리하게 파헤침으로써 당대의 최고 논객(論客)으로 평가받고 있다. SNS가 비중을 더해가는 시대에 82세 지성이 의연하게 서있는 것은 오랜 정치 현장의 직접 체험과 어우러진 해박한 식견이 바탕이 됐다는 얘기다. 식견과 논리 전개에 관한 한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가 한 수 접어줄 정도다. 논객으로서 송호근 서울대 교수나 윤평중 한신대 교수 등과는 또 다른 영역을 거니는 게 남 전 장관인데, 진중권 동양대 교수 등 진보 논객들과의 차별화는 다양한 현장 경험 속에서 닦은 내공(內功)에서 비롯한다는 게 많은 이들의 풀이다. 이런 남 전 장관이기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YS·DJ에 대한 규정은 이 관련 언급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자신의 저서 <언론 정치 풍속사>에서 ‘YS·DJ 성격’을 다룬 바 있는 남 전 장관은 “YS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일본말로 ‘앗싸리’하다. 맺고 끊는 게 분명하다. 정치적 해설을 하자면 경상도(출신)이기에 타고난 보수파이고, 평생을 행운아로 살았기에 너그러운 보수다.” “DJ는 끈질긴 노력가다. 정치적으론 전라도이기에 타고난 소수파, 인고의 세월을 살아왔기에 개혁적이다. 언더도그(underdog)로서의 진보성과 개혁성을 갖게 됐다”고 했다.

 

대통령 되기 전의 YS·DJ에 한정한다면 <야당 30년사>(인간사 출판, 1981년)를 펴낸 이영석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직대)을 견줄 이가 없다. 부제 ‘도전과 발자취’가 말해주듯 정권교체가 까마득해 보이던 시절에 출간된 이 책은 ‘애정 어린 질책’에도 불구하고 상도동 측으로부터 섭섭함의 표시가 적잖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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