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가 부결시키자 더 활활 타오르는 ‘보편적 기본소득’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6.0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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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기본소득’ 한 목소리 내는 보수와 진보의 동상이몽

6월5일 치러진 스위스 국민투표. 안건은 모든 성인에게 월 2500스위스프랑(한화 약300만원)을 주는 기본소득안. 결과는 부결이었다. 스위스 국민의 76.9%가 반대표를 던졌는데 찬성은 23.1%에 그쳤다. 국민 기본소득안은 성인에 대해서는 일자리 유무와 상관없이 매달 2500스위스프랑을, 18세 이하 청소년·어린이에겐 성인의 4분의 1 수준인 650스위스프랑(78만원)을 지급하는 게 골자다. 일종의 ‘시민 배당’의 개념으로 시민이라면 무조건 일정한 배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도입은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됐지만 기본소득 보장 논의는 오히려 더 본격화되는 모양새다. 특히 비슷한 기본소득 보장 정책 도입을 앞두고 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국가들에서 관심을 보이며 기본소득 보장 이슈는 스위스를 넘어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됐다. 기본소득 논의는 갈수록 심화되는 소득 불평등 해소 대책에 대한 사회적 요구로 대두됐다. 생산 활동의 인공지능화․로봇화로 앞으로 꾸준히 일자리가 감소할 것이란 문제의식도 이런 논의 확산에 기여했다.

 

 

스위스 버스 정류장 앞에 붙어 있는 국민투표 포스터.

 

 

보수주의자 학자도 노동당 지도자도 ‘긍정적’

지금까지 ‘보편적 기본소득(UBI)’이란 개념은 노동시장 자동화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다뤄져왔다. 이념 지도상에서는 다소 좌(左)측에 놓인 의제로 다뤄져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 기본소득을 보장해주자는 아이디어는 서로 다른 이념 성향을 가진 이들로부터 폭넓게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 소속 정치학자인 찰스 머레이(Charles Murray), 노동운동가이자 전(前) 미국서비스노조(SEIU) 회장 앤디 스턴(Andy Stern),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Angus Deaton) 프린스턴대 교수, 영국 노동당 재무 장관인 존 맥도넬(John McDonnell) 등 서로 다른 영역에서 다른 정치적 성향을 내던 저명인사들은 지금 ‘기본소득 보장’이란 아이디어에 관해서 한 목소리로 긍정하고 있다.

 

특히 보수적인 정치학자로 알려진 찰스 머레이의 반응은 흥미롭다. 6월3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모든 미국인에게 보장된 소득을(A Guaranteed Income for Every American)’이란 제목의 칼럼을 실어 기본소득 보장안의 적극적인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보편적 기본소득(UBI)야말로 지금껏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노동시장에 대처할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미국 시민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최후의 희망이다”고 주장했다. 머레이는 “좌파 지지자는 기본소득 보장안을 사회정의구현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자유경제학자들은 정부가 개입해 시민들 사이의 부를 재분배함에 있어서 가장 덜 해로운 방식이라고 본다”며 “양측 모두에게 보편적 기본소득안은 지금이 적기(適期)”라고 분석했다.

 

영국의 대표적 중도주의자로 꼽히는 조나단 레이놀즈(Jonathan Reynolds) 노동당 평의원 역시 보편적 기본소득안을 찬성한다. 6월6일(현지시각) 영국 하원에서 ‘보편적 기본소득(UBI) 정책 시행에 따른 시나리오’를 담은 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그는 “우리 경제와 노동시장이 변화하면서 복지국가는 그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애써왔다”며 “직장이 임금을 지불할 수 있게 하고 오늘날 영국이 목도하는 끔찍한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원한다면, 이제는 급진적으로 생각해야한다”고 말했다.

 

 

스위스 정부 관계자들이 국민투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비용절감’ vs ‘사회복지 실현’

‘보편적 기본소득 보장’은 오래된 개념이다. 16세기 토마스 모어의 유명한 저서 ‘유토피아’에서 시작된 아이디어인데 20세기 들어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버트런드 러셀 등 좌우 진영의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 개념을 긍정적으로, 그것도 꾸준히 언급해왔다. 왜 그럴까.

 

보수적인 학자들이 보편적 기본소득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행정비용의 혁신적 감축’이다. 이런 감축을 계기로 정부의 역할 역시 축소될 수 있다. 그러니까 보편적 기본소득을 보장하게 되면 복지시스템의 운영과 관리를 위해 들어가는 정부의 역할이 최소화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예측이다. 일부 자유주의 및 보수 경제학자들이 이 제도의 도입을 지지하는 이유다.

 

진보진영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보편적 기본소득안을 주로 사회복지의 무차별적․무조건적 실현이 가능하다는 점과 연결한다. 정창률 단국대 교수(사회복지학과)는 “보수와 진보의 입장을 일반화해서 말하긴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이 의제를 지지할 때 서로 보는 각도가 다르다”며 “두 주장이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접점이 있다는 점에서 공존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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