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왕자는 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나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6.06.08 16:50
  • 호수 139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우디 왕자가 왔다갔다는데 들어보셨나요?”


지난 며칠 동안 기자가 주변의 지인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던 질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소식을 알고 있었다고 답변한 지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우디 왕자 방한 소식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사람들이 알았겠냐구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후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개를 끄덕이는 분이 제법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중동 최대 부호(富豪)이자 ‘아라비아의 워렌 버핏’으로 불리는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가 자신의 전용기 편으로 5월16일 방한해 10시간가량 머물다 떠났습니다. 알 왈리드 왕자는 한국에 머무는 시간 동안 황교안 국무총리와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은성수 한국투자공사(KIC) 사장, 박진회 한국 씨티은행장 등과 만나 제다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제다 프로젝트는 사우디에 세계 최고층인 200층 높이(1008m)의 킹덤타워 등 두바이 3배 규모에 달하는 초대형 신도시 킹덤시티를 건설하는 사업입니다. 
 
알 왈리드 왕자의 방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중동 어느 갑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동 최대 부호로 영국 축구리그 맨체스터 시티의 구단주 ‘만수르’를 꼽지만, 알 왈리드의 재산은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알 왈리드 왕자는 세계 부호 순위를 매기는 조사에서 한 번도 10권 밖을 넘어간 적이 없습니다. 그는 미국 씨티그룹, 세계 최고급 호텔체인 포시즌스 호텔의 최대주주이면서 애플, 디즈니, 트위터, 타임워너 등의 대주주이기도 합니다. 그가 투자한 기업마다 큰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알 왈리드 왕자를 일컬어 ‘아라비아의 워렌 버핏’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가 가는 국가마다 정상들이 직접 관저로 초청해 회담을 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5월16일 황교안 국무총리가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방한중인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킹덤홀딩스 회장과 접견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알 왈리드 왕자는 박 대통령과의 만남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알 왈리드 왕자=아라비아의 워렌 버핏’

우리나라도 1999년 알 왈리드 왕자가 첫 방문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초청해 청와대에서 회담을 가졌습니다. 알 왈리드 왕자의 방한은 이번이 두 번 째였던 만큼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으나,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 했습니다. 기자인 저마저도 2주가 지난 후에야 정부 관계자를 통해 이야기를 들어서 알 정도였으니까요. 알 왈리드 왕자의 방한 소식이 비교적 축소보도된 이유는 그의 방문 시간이 10시간에 불과했던 것도 있지만, 대통령과의 회담이 불발된 이유가 커 보입니다. 해외순방을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청와대의 전례에 비춰봤을 경우, 박근혜 대통령이 그를 직접 만났다면 청와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청와대는 이번 방한을 주선한 업체를 통해 박 대통령과 알 왈리드 왕자와의 만남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알 왈리드 왕자는 박 대통령과의 만남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알 왈리드 왕자의 방한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정부 측 인사는 거절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5월 초에 있었던 이란 방문이 사우디 측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란과의 교역을 하겠다며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한 것이 이란과 적대 관계에 있는 사우디 입장에선 상당히 불쾌했던 것 같다. 사우디 입장에선 한국이 그 정도의 정성을 보인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우디 쪽에선 우리나라 기업의 사업이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던 외교라인이 대(對)중동 외교에 있어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 셈이다. 그럼에도 외교부 장관은 역대 최장수 외교부 장관이란 칭찬을 받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 외교가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사우디와 이란은 이슬람의 두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를 대표하는 국가들입니다. 1400년 전부터 시작된 해묵은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는 두 국가의 관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중동 전문가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이란을 애지중지하는 우리나라의 모습이 사우디 입장에선 불쾌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물론 두 사람의 회담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는 다른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일 달러를 유치하기 위해 대규모 사절단까지 꾸려서 중동으로 날아가는 마당에, 우리나라로 찾아온 중동의 거부(巨富)를 대통령이 직접 만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황교안 총리가 만나기는 했지만, 대통령이 가지는 무게감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란 순방의 효과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있는 상황에서 중동 최고 부국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마저 악화될 경우 우리나라의 대중동 관계는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