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음식인류학] 동양의 ‘이열치열’ 서양에서도 통했다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24 15:32
  • 호수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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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음식으로 더위 이기는 여름음식의 과학

여름이 되면 팥빙수와 냉면처럼 찬 온도로 몸을 식혀주는 음식이 부각된다. 하지만 전통사회에선 여름이 되면 오히려 몸을 덥게 해주는 음식을 먹는 편이었다. 육개장처럼 얼큰하고 국물이 많은 음식을 아주 뜨겁게 뚝배기에 담아 먹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왜 더운 여름에 더 덥게 먹는가 싶겠지만, 이것이 바로 한자문화권의 여름철 건강 유지법 필수조항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원리다. 

 

이열치열이란 ‘열로써 열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원리는 기화열을 응용하는 것이다. 냉장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더워진 몸을 식히려 해도 찬 음식을 구하기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럴 때 오히려 몸을 더 덥게 하는 음식을 먹으면 땀이 나게 되고, 그게 높은 기온에 의해 증발되면서 몸 표면에서 기화열을 빼앗아가서 체온이 오히려 내려가게 된다. 이 방법에는 아주 좋은 점이 더 있다. 땀과 함께 몸속의 노폐물이 체외로 배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삼계탕이나 육개장을 한 그릇 먹고 나면 땀이 비 오듯 흐르면서 몸도 마음도 개운한 맛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마늘·인삼 등 몸을 데우는 식재료 듬뿍 넣어

 

개고기에 파를 통째로 섞어 삶아 충분히 익힌 후 고춧가루 등 양념을 듬뿍 넣어 끓여내는 개장국(보신탕),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쓴 육개장, 닭고기에 마늘·인삼 등 몸을 데우는 식재를 듬뿍 넣어 푹 끓이는 삼계탕, 개울가에 솥을 걸고 물고기를 잡아 고춧가루·마늘을 듬뿍 넣어 끓여 온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던 ‘천렵(川獵)’ 민물고기 매운탕 등등, 모두 이열치열의 원리로 여름의 더위를 식히고 몸속을 맑게 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데 애용되던 음식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서민들의 메뉴였고, 양반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달랐을 수도 있다. 한여름에도 갓을 쓰고 띠를 두른 긴소매 두루마기를 입고 꼿꼿이 앉아 있어야 하는 양반. 그 의관을 망가뜨려가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끝까지 품위를 지키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 띠를 두르고 있으면 미칠 것 같아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싶어진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당(唐) 시인도 있었지만, 그 미칠 것 같은 상태를 꾹 참고 또 참으면 병이 되기 싶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바로 그런 이유로 여름만 되면 파들파들 신색이 약해져가는 어느 양반 선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부인은 그렇게 여름만 되면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어떤 음식으로 보신을 해주어야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남들은 복날이 되면 다 먹는 뜨거운 국물음식을 그 선비는 마다했기 때문이다. 땀이 흘러 옷모양새를 다 망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 계집종이 마님에게 새로운 레시피를 귀띔해주었다. 닭을 삶아 차게 식힌 물에 볶은 깨를 갈아 넣고 찌꺼기를 밭쳐 맑은 국물만 장만한 뒤, 그 위에 미나리와 버섯 데친 것, 오이채, 황백 지단을 얹은 후 국수를 말아 깨국탕을 선비에게 내자, 그는 한 그릇 뚝딱 비우고 곧 기력을 회복했다. 참깨는 적은 양으로도 높은 열량을 낼 뿐 아니라 몸을 데우는 효과도 있어, 차게 내도 속을 냉하게 만들지 않는 좋은 식재다. 이 음식은 깨의 한자어인 ‘임자(荏子)’를 붙인 임자수탕으로 불리며 양반의 여름 보양식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삼계탕


 

냉장시설이 없던 여름에 닭 삶은 물을 차게 식히려면 여간 정성이 들지 않는다. 아마 닭을 삶아 큰 양푼에 담고 우물가로 가져가서 그보다 더 큰 함지박에 넣고 우물물을 채운 후, 계속해서 우물물을 퍼서 물을 갈아주어야 했을 것이다. 밥을 지어 뜨거울 때 퍼서 찬 우물물을 담은 큰 양푼에 넣어서 ‘급속 냉각’한 후, 물기를 빼서 두고 먹는 ‘물밥’ 같은 것도 같은 원리로 만든 여름음식이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찬 음식’을 여름에 먹는 것은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서민들에겐 힘든 일이었을 테다. 

 

한여름에 얼음처럼 차게 식힌 음식이나 혹은 얼음 그 자체를 먹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예 얼음처럼 얼려버린 음식을 만들기는 더 어렵다. 대표적인 메뉴가 이제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디저트인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같은 빙과를 만들려면, 재료를 섞은 후 많은 양의 얼음 속에 한동안 두어야 한다. 지금처럼 냉장고의 냉동실 같은 간편한 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걸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이스크림의 역사는 꽤 길지만 아주 간단히 정리해보자. “페르시아제국이 발명하고, 로마제국이 수용했으며, 이슬람 연금술사들이 혁신하고, 르네상스 유럽이 대중화했으며, 현대 산업이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역사가 기원전 8세기 정도로 거슬러가니, 아이스크림의 역사는 근 3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중 서민까지 누구나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부터니까, 참 오랜 세월 동안 귀족의 전유물로 지켜져온 음식임을 알 수 있다.

 

 ‘라타투이’, 유럽형 이열치열 여름음식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처럼 선명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유럽이나 기타 지역에서도 여름음식은 비슷한 원리로 장만되었던 것 같다. 유럽에서 여름철이면 먹는 것으로 알려진 전통적인 절기 음식 중에는 ‘몸을 덥게 해주는’ 레시피가 대부분이다. 토마토·칠리·후추·마늘·옥수수·감자 같은 것은 더운 성질을 가진 것으로 분류되는 채소들이며, 닭고기 역시 육류 중에서 더운 성질을 가진 것인데, 이들이 서양 전통 여름음식의 대표적 식재들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라따뚜이(Ratatouille)》라는 따뜻한 애니메이션을 통해 잘 알려지게 된 라타투이 같은 것이 대표적인 유럽형 이열치열 여름요리다. 토마토·가지·마늘·양파 등의 야채를 작은 깍두기처럼 썰어 올리브유를 두른 팬 위에서 볶은 후 육수와 허브,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어 뭉근하게 조려내는 음식이다. 태양이 내리쬐는 지중해, 뜨끈한 라타투이를 옥수수 크래커와 함께 실컷 먹고 나면, 역시 땀이 흐르면서 온몸이 개운해지는 상쾌함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라타투이


 

“당신이 어떤 걸 먹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미식론》으로 유명한 18세기 프랑스 정치가 장 브리야-사바랭(Jean Brillat-Savarin)의 말이다. 여름음식의 조리법을 보면, 지구 어디에서 살아온 사람이든 대체로 비슷한 원리로 음식을 장만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어디 살든 본질적으로 비슷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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