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것을 나쁘게 칭할 수 있는 권리
  • 남인숙 작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24 15:49
  • 호수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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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숙 작가


 

‘옛날 옛적에’ 두창, 혹은 천연두라는 질병이 있었다. 두창은 보균자 중 절반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것도 스무 살 아래의 꽃 같은 생명만 취했다. 사람들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면서 자식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이 무시무시한 병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마마’라고 높여 불렀다. 병을 부리는 귀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병명을 직접 부르지 못하게 했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요즘 여러 기사나 칼럼들을 보면서 두창을 두창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찜찜함을 느낀다. 부쩍 늘어난 성범죄 관련 기사 헤드라인에서 ‘몹쓸 짓’ ‘호기심에 그만…’ ‘철없는…’과 같은 넓혀지고 문질러진 용어들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이다. 초등학생의 불장난을 두고도 무리 없이 대체해서 쓸 수 있을 말들이다. 예전에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마마라는 금기 대체어를 낳았다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무엇이 두려워서 나쁜 행위를 정확히 부르지 못하고 있는가. 

 

일부에서는 성범죄를 가볍게 여기는 우리 사회의 후진적인 젠더 감성 때문이라고 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을 직접적으로 입에 담고 싶어 하지 않는 엄숙주의가 한몫한다고 본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성, 더구나 그에 관련된 범죄는 간접적으로만 말해야 모두의 체면을 지킬 수 있는 그 무언가다. 이런 터부는 성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만 낳았을 뿐 실제적으로 우리 모두를 진짜로 점잖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10만 명당 13.5건으로 세계 최고 수준인 성범죄율이 그 방증이다. 우리보다 성 상품화가 심각하다 여겨지는 이웃 나라 일본의 12배 수준이다.

 

언어는 의식의 반영이지만 반대로 의식을 조종하기도 한다. 깜찍하게 에둘러 표현된 ‘강간’을 그 누가 형법상 ‘살인강도’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강력 범죄로 인식하겠는가. 성범죄를 살인에 준하는 강력범죄로 인식하는 서구에서는 ‘sexual assault’(성폭력)라는 단어조차 간접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검색을 해보면 ‘rape’(강간)라는 직접적인 단어가 공식적인 글에도 자주 쓰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겐 이 단어가 쉽지 않다. ‘강간 피의자 ○○○, 검찰에 송치’라는 기사제목이 ‘걸그룹 △△△, 가슴골이 드러나는 아찔한 의상’ 유의 것보다 더 유해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지구상에서 이미 사라진 ‘마마’의 나라에 아직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든 강간을 강간, 성희롱을 성희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젊은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어이없는 두둔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이중, 삼중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적확한 단어를 골라 쓸 때도 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는 나쁜 것을 나쁜 만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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