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빈 토플러, 세상을 움직인 위대한 작가의 죽음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7.0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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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학계의 큰 별이 하나 졌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6월27(현지 시각)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린 토플러 협회는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어릴 적 소설 작가가 되길 꿈꿔왔던 그는 비록 순수 문학작품은 아니지만 통찰력을 담은 지적인 글을 남기며 세상을 움직인 ‘작가’가 됐다.


실천적 경험과 특유의 통찰력으로 20세기 중후반 세상이 목도할 변화상을 예견한 토플러. 그의 대표 저서들은 지금도 스테디셀러에 올라있다. ‘미래의 충격’ ‘제3의물결’ ‘권력이동’ 등의 저서는 출간된 지 최대 4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대학가 필독도서로 꼽힌다. ‘지식의 과부하’ ‘권력이동’ ‘디지털혁명’ ‘지식시대’ ‘프로슈머’ 등 그가 저서를 통해 고안해낸 표현들은 이제 일상어가 됐다.

6월27일 사망한 세계적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모습

그는 어쩌면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을지도 모를 시대인 20세기를 관통해 살았다. 1928년 10월4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토플러의 부모는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 모피상이었다. 어릴 적 검소한 가풍 속에서도 부족할 것 없이 자란 그는 뉴욕대 재학 시절 인생에서 중요한 두 가지를 만나게 됐고 곧 깊이 빠져들게 된다, 

첫 번째는 그의 아내가 된 애덜레이드 패럴과의 만남이다. 결혼 후의 이름인 하이디 토플러로 잘 알려진 그의 아내는 같은 대학에서 언어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하이디 토플러는 이후 앨빈과 모든 학문적․사상적 여정을 함께하며 평생의 동반자로 살았다. 앨빈의 대표작들은 모두 그의 아내 하이디 토플러와의 협업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책 표지에는 앨빈의 이름만 새겨져 있지만, 생전에 앨빈은 그의 책들은 모두 그의 아내와 공저한 것이라고 시인했다.

두 번째는 급진적 좌파 사상과의 만남이다. 아직 결혼 전이었던 토플러 커플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급진적(radical)’이었다고 한다. 진보주의에 꽂혔던 이들 커플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보당에 입당했다. 진보당은 미국의 독립적 좌파 정치인인 헨리 월러스(Henry Wallace)가 세운 정치조직이었다. 급진 진보주의와 토플러 커플의 만남은 의외의 행보로 이어졌다.

1950년 토플러 커플은 결혼했다. 토플러 부부가 된 이들은 클리브랜드의 공장 노동자로 취직한다. 모피상의 자녀로 한때 문학 소년을 꿈꿨던 영문학도가 팔자에도 없던 망치와 용접기를 손에 든 것이다. 앨빈은 목수이자 용접공으로 일했으며 아내 하이디는 알루미늄 주조공장에서 일했다. 사회주의적 혁명을 꿈꿨던 이들은, 노동자의 삶을 실제로 접하곤 이내 극좌파적 시각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블루칼라의 삶을 직접 살아본 토플러 커플은 1959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1962년까지 포춘지에서 노동 분야 칼럼을 쓰던 앨빈은 이후 프리랜서 칼람니스트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미래학 연구에 들어갔다. 1960년대 중반 토플러 부부는 ‘미래의 충격’ 집필을 위해 5년 간 관련 연구에 들어갔다. 이 책은 그를 일약 세계적 지식인 명단에 올렸다. 이후 비슷한 주제의식으로 이어간 ‘제3의 물결’ ‘권력 이동’ 등 수많은 저서와 칼럼을 쓰면서 그는 비즈니스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됐다. 글로벌 경영컨설팅 기업 엑센츄어는 토플러를 빌 게이츠와 피터 드러커에 이어 비즈니스업계에서 세 번째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기도 했다.

토플러 커플은 1996년 ‘토플러 재단’을 세우고 10년 뒤 또 한권의 저서 ‘혁명적 부’를 출간했다. 글로벌 경제 속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구분이 흐려지는 현상을 예견하고 비금전적 부에 대한 전망을 그린 이 책에서 지금은 일반화된 용어 ‘프로슈머’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토플러의 예측이 자주 틀렸고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는 인간의 능력을 간과했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토플러는 “미래학자의 논쟁은 사회적 진보를 이끌어내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미래학자들에게는 ‘아직’이란 마법의 용어가 있다”며 비평가들의 지적에 대해 여유 있게 대응하기도 했다. 토플러 부부는 자신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독일의 통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성장 등을 미리 예측하는데 성공했다고 자평한다. 앨빈 토플러는 생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1970년 저서 ‘미래의 충격’에서 언급한 케이블방송국의 성장, 비디오 레코딩, 가상현실, 미국 가족의 분화 등에 대한 예측이 맞아 들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의문이 생기면 직접 해보기로 유명했던 그는 ‘실천적 지성’이었다. 그의 사상과 행보는 세계 여러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줬다. 특히 중국의 정치인 자오쯔양(趙紫陽), 싱가포르 정치인 리콴유(李光耀), 그리고 한국의 김대중 등 아시아 신흥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이 막대했다. 미국의 한 학자는 이를 두고 “1900년대 중반 중국, 한국, 베트남에서 산업화․개방화를 표방한 이들은 앨빈 토플러가 그린 ‘실리콘 밸리‘와 같은 꿈을 꾼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개혁개방 운동 이후의 중국에서는 그의 위상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토플러의 저서 ‘제3의 물결’은 1978년 개방정책 이후의 중국에서 유명세를 타며 국가적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부인 하이디 토플러가 제작한 ‘제3의 물결’ 비디오 버전은 중국 각 학급에 배포됐다. 앨빈의 이름은 2006년 중국 공산당이 선정한 ‘중국에 영향을 준 50인의 외국인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이 비디오는 중국 당국이 무단으로 복사한 것으로 토플러 부부에겐 단 한 푼의 저작권료도 지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말이 미래를 향하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그가 늘 한 발은 현실이라는 땅 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생전 책과 칼럼을 통해 주옥같은 말들을 남겼다. 20세기 최고의 미래학자이자 사상가였던 그를 추모하며 ‘토플러 어록’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건 어떨지. 

 

"변화는 단지 인생에 필요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다."

"지식은 권력의 가장 민주적인 원천이다."

"미래의 문맹은 읽는 법을 모르는 자가 아니라 배우는 법을 모르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린 작은 일을 하면서도 큰 그림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그 모든 작은 것들이 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온전한 정신’이란 말의 정의 중 하나는 초현실적인 것들 가운데 현실적인 것을 볼 줄 아는 능력이다. 곧 우린 새로운 정의가 필요해질 것이다."

"미래 충격은 우리가 개인을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날 지나치게 많은 변화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서 초래할 엄청난 스트레스와 혼란을 의미한다."

"오늘날 당신은 원하는 만큼의 양적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데이터를 모두 신뢰할 수 있단 건 아니다. 여전히, 당신은 주어진 데이터들을 불신하고 당신의 지식과 판단력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많은 관리인들은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되도록 훈련받았다. 바로 ‘관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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