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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용 회고록] YS 마음은 이인제에… ‘잘 따르고, 똑똑하고, 당찬’

출신·나이·성향도 ‘딱’이라고 판단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22(Fri) 16:11:13 | 13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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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IJ)가 없었다면’은 제15대 대선을 리뷰할 때 빠지지 않는 가정(假定)이다. IJ가 얻은 500만 표 때문이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후보가 신한국당 이회창(昌) 후보를 꺾은 게 불과 39만 표.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의 DJP연합을 아무리 ‘부풀려’ 대입해도 500만은 셈이 안 나오는 탓이다. 대선 승패를 가른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인 IMF 사태라는 시대적 상황마저도 이 500만 앞에서는 빛을 잃게 마련이다. 그 ‘IJ는 누구인가, 왜 그런 사태가 벌어졌나’는 15대 대선에만 소용되는 물음이 아니다. 모든 ‘정권 교체기’에 참고할 소재가 그득하다.


“김영삼(YS) 대통령은 이인제(IJ) 경기지사를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과 엇비슷한 체구에다 당당하게, 유머를 섞어가며 똑 떨어지게 말하는 그를 좋아했다. ‘유식(有識)한’ 것도 단단히 한몫했다. 투쟁이라면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그러나 ‘글 짧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던 상도동 가신들 속에서 그는 확실하게 차별화됐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말이다. 


“‘80년 서울의 봄’ 호기를 놓치고 전두환 정권과 다시 한 판 맞붙는 YS에게 판사 출신인 노동인권 변호사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나. YS는 소위 ‘3박자’를 갖춘 IJ를 흡족해했다. 13대 총선 때 노동인권 변호사의 강점을 살려 경기 안양(갑)에 내보냈더니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고, 3당 합당 뒤 민정계와 힘겨루기를 할 때도 밀리는 법이 없으니 YS가 귀여워할 만했다.”

 

 

청와대 행사에 참석한 이인제 노동장관(왼쪽).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최연소 각료로 임명하고 민선 경기지사에 당선시키는 등 ‘후계 수업’에 공을 들였다.


 


‘소통령’ 현철은 고교 선배 IJ 전폭 지원


“사법시험에 합격한 수재, 노동인권 변호사, 재선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정치 지도자에게는 근사한 경력이다. YS가 IJ를 경기도 지사 선거에 출마시킨 게 괜한 일이 아니다. YS가 ‘세대교체’ ‘젊은 후보’라는 단어를 동원한 것은 계산된 수순이다. YS가 ‘IJ가 딱’이라고 생각한 데는 경력·스타일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싸움(거리투쟁)밖에 모르는 야당 사람’ ‘자기 파벌(상도동계), 고향 후배’ ‘구시대’ 등 누구를 후계자로 내세우건 한 가지는 걸리게 마련인 시비 요소를 일거에 물리칠 강점을 지녔다. 거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퇴임 후 YS의 컨트롤이 먹히리라 여긴 게 IJ 카드였다. 나이(당시 49세), 고향(충남 논산), 학력(경복고-서울대 법대)은 ‘맞춤’이었다. 나이는 YS가 의도한 ‘3김 시대 청산’을 외치기에 적당했다. 고향은 ‘영남 일색을 탈피하면서 부담스러운 TK 도전’을 떨쳐내기에, 학력은 ‘엘리트로 인정받지만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는’ 수준이었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대중에 어필할 이미지를 구비했다는 말이다.” 


“IJ가 경복고 출신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통령’으로 당시 정·재계를 주무르던 대통령 차남 현철이 경복고다. 문민정부를 ‘K-2(경복고) 전성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YS가 IJ를 애지중지한 데에는 고교 후배 현철의 지원이 상당했음은 물론이다. 대통령의 호감과 신뢰에다가 ‘소통령’의 응원이 있었으니 IJ로서는 날개를 단 셈이다.” 민주계 인사들의 얘기는 엇비슷하다. YS가 언제부터 IJ 밀기를 본격화했는지 등에 대해선 증언이 약간씩 다르지만 기본은 일치한다. 


중견 언론인 K씨의 증언은 YS가 일찍부터 IJ에게 공을 들여왔음을 보다 또렷이 해준다. “YS가 출입기자들에게 ‘차기’를 언급하며 ‘세대교체’를 꺼냈을 때다. IJ를 상정한 발언임에도 눈치 챈 이는 많지 않았다. ‘설마 IJ?’했다. 이럴 즈음 안기부 중간간부가 전화를 걸어왔다. ‘경기지사 IJ를 주목하라’고. 며칠 뒤 직접 만났을 때 그 간부는 ‘후계자는 IJ다. YS가 IJ에게 직접 독려하는 통화를 확인했다’고 IJ설을 재확인했다.” 경기지사 관저를 감청하는 과정에서 얻은 ‘첩보가 아닌 생생한 정보’이며, 통화 내용 전후를 살펴보면 후계 관련한 두 사람의 교감은 아주 오래된 것 같다는 분석도 곁들였다는 것이다.

 


안기부 감청으로도 확인된 YS의 IJ 출마 독려


“정치 현실은 최고 권력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YS가 ‘젊은 후보론’을 설파하면서 IJ가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하긴 했지만 압도할 만큼은 물론 아니었다. 청와대 비서실장 2년 뒤, 정치특보를 하면서도 마음에 걸렸다.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차기 대선후보) 교통정리를 하셔야지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IJ도 그렇고…. 저렇게들 각자 조직을 확대한다며 뛰고들 있는데 올해를 넘기면 나중에는 말릴 수도 없게 됩니다’는 진언을 YS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간단히 받아넘겼다. 한데 이후 사태 전개 양상은 내 기대와 달랐다.” YS 차남 현철과의 갈등으로 청와대를 떠났던 박 전 국회의장의 전언이다. 그의 말 뒤쪽에는 昌이 세를 더하고 고개를 치켜들수록 YS의 IJ에 대한 집착이 커진 듯싶다는 ‘묵언(默言)’이 담겨 있다.


“YS는 후계 구도를 자신이 재단할 수 있다고, 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회창·이홍구·이수성 세 전직 총리와 박찬종·최형우·김덕룡·김윤환·이한동, 그리고 이인제가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난립하는 상황에서 당 총재를 겸한 대통령의 입김은 절대적이라고 확신했다.” “역대 군부 철권정치와 맞서 싸워온 YS다. 더 험한 상황도 견뎌온 YS다. 하물며 현재 권력인 YS가 집안(여권) 문제마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웠다고 보면 틀림없다.” 당시 여권 관계자들의 회고다. 


하지만 현실은 YS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굴러갔다. 대선이 있는 1997년 새해 들어 정치 지형이 급변했다. YS에겐 최악의 사태가 초래된 것이다. 한보(韓寶) 사태로 경제 전체가 요동치는 가운데, 차남 현철이 한보 대출 과정의 수뢰로 검찰조사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의 회고처럼 YS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지율 10%가 못 되는 ‘식물 대통령’의 영(令)이 설 리 없음은 당연했다. 3월13일, 昌을 신임 당 대표로 임명하는 게 당 총재로서는 사실상 마지막 권한 행사였다. 다시 국회의원이 된 박관용 초대 비서실장을 당 사무총장으로 배치한 정도가 YS가 추가로 한 전부였다. 박 총장 역할과 관련, 일각에선 JP가 민자당 대표 시절 최형우 사무총장으로 하여금 JP 보좌보다는 감시 역할을 수행케 한 전례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박 총장’은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중차대한 시점에서 어수선한 당의 중심을 잡는 데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말한다(YS가 처음부터 昌을 당 대표로 임명하려 한 게 아니라, 이틀 전 최형우 의원을 청와대로 불러 대선에 나가지 않는 대신 당 대표를 맡으라고 했는데 최 의원이 거기에 충격을 받고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昌으로 대체했다는 게 일반적이다. (시사저널 2016년 4월5일자 1381호 ‘박관용 회고록’ 기사 참조) 어찌 됐든 확실한 것은 昌이 당권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권력형 비리로 여당 전체는 타격을 받았지만 신임 당 대표 昌은 깨끗한 이미지 덕을 톡톡히 봤다. 박찬종 전 의원도 마찬가지다. 그가 昌과 선두 경쟁에 나선 것은 당시 뜨거운 이슈였던 부패척결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3월 하순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 기관 리서치 결과를 보면 昌 혹은 박 누구든 여당 후보가 되면 각기 DJ를 7%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돼 있다). 昌으로선 경쟁자들을 따돌리는 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던 셈이다. 지지도에서 昌을 앞지르던 박찬종을 꺾을 수 있었던 것도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게 결정적이었음은 물론이다. 昌은 ‘대선에 나설 거면 당권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일축했다. 이는 후일 전당대회에서 탈락한 IJ에게 경선 불복의 빌미가 된다. IJ는 불공정 게임 결과를 수용 못한다면서 탈당 후 독자 출마를 감행했다.

 


‘결국 昌’ 발언한 정무수석 즉각 경질 


昌은 당 총재인 YS에게 후보 조기 확정을 요구했다. 청와대의 복안은 ‘대선 3개월 전인 9월 중’이었으나 昌의 주장을 뿌리칠 힘이 없었다. 상대 새정치국민회의가 5월20일 DJ를 후보로 뽑고 대선 고지를 향해 치닫던 것도 YS를 압박한 요인이었다. 결국 7월21일로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 날짜가 정해졌다. 

 

9룡(龍) 쟁패는 중풍으로 쓰러진 최형우 의원과,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날개를 접은 김윤환, 정치 불신을 이유로 이홍구 후보가 하차하면서 약간 정리는 됐으나 혼전은 여전했다(민정계 최병렬 의원도 뒤늦게 경선에 합류). 부동(不動)의 1위를 달리던 박찬종 후보도 조직과 자금을 앞세운 昌의 세몰이엔 역부족이었다. 

 

이런 가운데 더욱 거세진 불공정 시비는 강인섭 청와대 정무수석의 ‘결국 昌’ 발언으로 폭발했다. 불과 4개월 전, 3년 넘게 YS를 보필한 이원종 수석의 바통을 이어받았던 강 수석은 “누가 후보가 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순진하게도’ “昌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으냐”고 답변했었다. 전당대회 열흘 전인 7월11일의 ‘사건’이다. 민감할 대로 민감하던 시점에서 나온 이 발언은 즉각 ‘청와대가 昌을 밀고 있다’로 퍼져 나갔고 당은 난장판이 됐다. 가뜩이나 YS 비서실장 출신 박관용 의원이 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어 ‘청심(靑心=YS 의중)은 昌’이라는 의심의 불꽃이 튀는 판에 강 수석의 돌출 발언은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된 것. 

 

발끈한 YS는 그 즉시 강 수석을 해임했다. 후임은 조홍래 전 의원. YS는 강 수석의 ‘결국 昌’ 발언을 보고받자 “미친 XX”라며 화를 낸 것으로 전해진다. “표면상으로는 ‘천기누설(天機漏泄)’에 대한 문책처럼 돼 있으나 그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달리 도리가 없어’ 대표에 임명한 昌의 독주(獨走)가 못마땅한 처지에 후보 자리를 굳히는 결과가 화를 돋운 측면도 없지 않다”는 게 당시 여권 관계자들의 말이다.

 

 

신한국당과 소외된 TK…

昌은 漁父之利 (어부지리) 

 

 

 

민자당 총재인 김영삼(YS) 대통령은 1996년 12월6일 당 간판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건국 이래 장구한 세월 동안 집권해온 보수 정당에선 찾기 어려운 혁명적 조치였다. 자유당(이승만)-민주공화당(박정희)-민정당(전두환)-민자당(노태우)으로 이어지는 매 단계에선 말 그대로 혁명적 사태가 있었지만 YS의 신한국당 창당은 그 성격이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외견상으론 ‘평시(平時)’였다는 점이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는 곧 내면적으론 ‘혁명’에 준하는 상황이 있었다는 얘기와 통한다.

 

 

YS가 개명(改名)이라는 극약처방을 택하도록 한 혁명적 내부 상황이란 TK(대구·경북)를 중심으로 한 구민정계 세력의 반발이다. YS가 청와대 주인이 되면서 민주계가 집권 민자당 주류가 됐지만 만만한 민정계가 아니었다. 특히 지역적으론 TK를 배경으로 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면서 민정계 불만은 커질 대로 커졌다. 대구 등지에서의 참패라는 1995년 6월 지방선거 결과는 그 생생한 증거다. 또한 민자당의 한 축을 이루던 공화계 김종필(JP) 대표가 당을 박차고 나가면서 충청권도 멀어졌다. YS로서는 일대 인적 쇄신이 절실했고, 구(舊)세력 단절·청산이라는 강력한 의지 표현이 간판 바꿔달기인 것이다. 그리고 현역 대폭 물갈이가 이뤄진 1996년 4월 총선을 거치면서 당에 잔류한 민정계는 더욱 소외됐다.

 

눈칫밥 신세로 전락했다지만 수적으로도 별로 꿀리지 않는 저력의 민정계다. 이들이 눈길을 준 곳은 昌. 그 ‘엄한 시어머니’ YS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던 昌은 마침 전국구 의원으로 당에 합류했던 참이었다. 정치 경력이 일천(日淺)한 昌이 급속하게 세를 불리고, YS가 꺼림칙해하면서도 昌을 대표에 임명하지 않을 수 없던 또 다른 배경이다. TK 좌장인 허주(虛舟) 김윤환(사진) 초대 신한국당 대표가 대선후보 경선을 포기하고 昌 지지 선언을 하면서 昌은 우뚝 섰다. 민자당 시절 ‘YS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킹메이커’ 허주의 ‘昌 대세론’은 경선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2000년 제16대 총선 때 한나라당 총재였던 昌은 허주를 공천에서 배제했다. 허주는  절치부심(切齒腐心), 이수성·신상우·조순·이기택 등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한 중진들과 민국당을 창당, ‘昌 타도’를 외쳤다. 암으로 사망한 허주는 숨지는 날까지 昌의 화해 악수를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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