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개·돼지’가 되지 않는 방법
  • 남인숙 작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22 13:32
  • 호수 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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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난 한 주 전국의 개와 돼지들도 어리둥절할 만큼 ‘개·돼지’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었다. 한 공직자가 “민중은 개·돼지라 먹여만 주면 된다”라고 말했으며, 그 민중이 99%를 뜻한다는 친절한 부연까지 덧붙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가 교육부의 고위 공무원이라는 것이었다. 차관 바로 아래서 실질적인 교육 정책의 그림을 그리는 직책이다. 필자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실망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듯 이번에도 솜방망이 처벌에 슬그머니 넘어가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웬일로 이번 사태를 대하는 ‘1%’들의 태도는 달랐다. 여야 정치인들이 오랜만에 한목소리로 나서서 질타했으며, 정부의 대처도 빨랐다. 입을 잘못 놀린 그는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번에는 술김에 그랬다거나 본심이 아닌 실수였다거나 하는 변명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육부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


이건 이제까지 필자가 목격한 대한민국의 방식이 아니었다. 교사가 어린 학생을 성추행해도 직업을 유지할 수 있고, 강간을 해도 무혐의 처분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으며, 비정규직 어린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사망해도 딱히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범죄도 아니었고, 특정 피해자가 있는 사건도 아니었는데, 논란의 당사자가 공공의 적이 되어 응징을 당했다.


이 사건이 전의 것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곰곰 생각하다가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냈다. 사안의 중대성과 상관없이 그가 심기를 건드린 대상이 ‘99%’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심각해도 특정 계층이나 소수가 당한 일들은 쉽게 묻히고 잊힌다. 그들이 개·돼지로 여기는 우리 민중들은 각자의 삶이 너무 고달파서 남의 일에 오래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다르다. 웬만한 민초들은 그 악담의 대상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 일을 방관하거나 어영부영 대처하는 1%는 99%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다. 눈치 볼 이익집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 정서를 건드는 것도 아니니 시원하게 민심을 달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국민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유럽 정치 선진국들에서는 자기 일이 아닌 일들에도 일제히 나서서 부조리를 비판하고 개선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소수 사람들의 피해와 아픔이 외면을 받지 않는 사회에서는 1%의 양떼몰이에 민중이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먹고사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서 사회적인 부조리에 분노할 힘이 없다. 그래서 내 눈앞 밥그릇에 밥만 채워지면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어영부영 움직여주는 개·돼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오명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것뿐 아니라 남의 밥그릇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는 것일 테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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