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여왕의 '남다른' 소통법
  • 권석하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25 13:41
  • 호수 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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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인기비결 분석

 

브렉시트(Brexit)에 대한 찬반 투표로 국론이 양분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 영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5월과 6월에 걸쳐 올해 90세를 맞이한 엘리자베스 2세를 위한 각종 축하 행사가 전국적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65년을 재위 중이고 동시에 가장 장수하는 여왕의 생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대명천지에 선출되지 않고, 혈통에 따라 권력을 손에 쥔 여왕이 이렇게 민주주의 본산 영국 국민들의 대단한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영국 왕실의 현재 인기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왕실은 한때 계속되는 악재로 인기도가 최악이었던 적이 있었다. 왕실 가족의 잇단 이혼과 다이애나 전 세자빈의 의문의 죽음이 바로 그 이유였다. 전대미문의 위기로 인해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다시 살려낸 것은 여왕의 적극적인 동의 아래 측근들이 만든 ‘웨이 어헤드(Way Ahead)’라는 홍보전문 궁내(宮內) 조직이다. 이 조직은 왕실과 관련한 추문에 적극 대처해서 조기에 진화하고, 호의적인 여론 조성을 위해 장기 계획을 세워 활동했다. 대부분 군 경력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기존의 홍보인원을 홍보 전문가와 언론인 출신으로 메웠다. 덕분에 한 언론인의 말처럼 ‘역사상 최고의 브랜드 부활 홍보 작전 사례’를 만들어냈다. 이 조직은 홍보 주안점을 바로 ‘선명성(transparency), 적정성(relevance), 가성비(value)’ 세 가지에 두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9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런던 버크셔에 있는 윈저성 근처를 걸으며 여왕의 행운을 비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왕실 권위 떨어지자 ‘소통’ 위한 조직 출범 


왕실을 두고 헛소문이나 추측이 존재하지 않게 모든 사안을 ‘선명하게 국민들에게 바로바로 알리는 전략’을 첫째 목표로 했다. 이어서 왕실이 하는 행사나 활동이 국가와 국민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적정한 이유와 명분’을 집중적으로 홍보했다. 또 왕실의 행사와 활동이, 결코 궁중의 전통이라고 생각 없이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국민들에게 인식시켰다. 항상 ‘국민의 돈을 결코 헛되지 않게 아껴 쓴다’는 점도 적극적으로 알렸다. 말만이 아니라 동시에 과거 매년 평균 8000만 파운드에 달하던 왕실 운영비를 3000만 파운드로 대폭 줄였다. 거의 3분의 1로 줄었으니 왕실 살림살이에는 궁색한 티가 확실하게 날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여왕이 외국 순방 때 사용하던 왕실의 상징 같던 대형 요트 브리타니아도 퇴역시키고 자신을 위해 수고하는 왕실 직원 파티, 성탄절 파티도 눈물을 머금고 없앴다. 심지어는 버킹엄궁의 보일러가 고장 나도 예산이 없어 금방 수리가 안 될 정도라는 믿을 수 없는 얘기가 가끔 보도된다. 


또 과거 같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여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 전원이 적극적으로 자선단체와 봉사 및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전통적으로 세금 납부 의무가 없는 여왕과 찰스 왕세자도 소득세 자진납부를 해서 여론을 호의적으로 돌렸다. 자신의 주말 거처인 윈저성에 화재가 나자, 버킹엄궁을 1년에 두 달 개방해서 생긴 돈으로 수리했다. 이로써 국민 세금 없이 궁을 수리한다는 점과 자신이 사는 집을 공개해 국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석이조를 동시에 얻어냈다. 사실 궁을 개방해 여기서 받는 입장료를 궁 수리비용로 쓰는 왕실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버킹엄궁은 이때 여왕의 아주 개인적인 공간만 빼고 거의 개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시 8, 9월에 런던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이곳을 방문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뿐만 아니다. 1년에 총 네 번, 한 번에 8000명의 손님을 초대해 버킹엄궁과 에든버러의 홀리루드궁 정원에서 5~6월에 파티를 연다. 지금까지 여왕이 초대한 연인원만도 거의 120만 명에 달한다. 궁궐 파티라고 해서 엄청난 음식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샌드위치 몇 종과 케이크에 영국 홍차를 곁들여 마시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가든 파티가 주목받는 것은 초청 대상 때문이다. 영국 사회 곳곳의 그늘진 데서 봉사하는 청소부·우체부·간호사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초청돼 오는 손님이다. 여왕이 그들의 평소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파티이다. 


왕실 가족 전체가 후원하는 영국 내 자선단체는 2415개이고 해외 후원단체까지 합치면 도합 300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대단하다. 이렇게 영국 왕족과 귀족들은 ‘자선’이 바로 직업이라고 할 정도로 영국 자선단체의 후원자 역할을 한다.


이런 왕실의 봉사와 자선 노력의 결과로 여왕의 인기도는 2012년 즉위 60주년 기념식인 ‘다이아몬드 주빌리’ 때는 90%까지 올라갔다. 사실 이런 높은 인기도도 여왕의 따뜻한 인간성과 진정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고도의 홍보전략이 있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여왕에 대한 평은 공식 석상이나 각종 행사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만들어진다. 여왕의 소통능력은 비범하다고 모두들 인정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바로 아래와 같다. 

 


여왕 만난 사람들이 자발적 홍보대사 자처


△질문을 대단히 많이 한다 △질문을 하고는 그 대답을 주의를 기울여 듣고 거기에 대한 적절한 언급을 해서 대화 상대자로 하여금 여왕이 자신과의 대화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심지어는 필요에 따라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상당한 배려를 그 자리에서 조치해준다 △그리고는 잊어버리지 않고 상당한 기간이 흘러도 후속조치까지 한다.


이렇게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고 엄격하고 근엄한 표정의 여왕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이런 개인적인 배려를 잊지 않고 해주면 바로 그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여왕의 ‘궁 밖 자원 홍보원’이 된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면서도 선출된 권력 못지않게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한 나라의 지도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간의 평에 관심을 가지고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되도록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유지관리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온 국민이 자신의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일만큼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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