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타트업의 그림자 “잘되겠다 싶으면 대기업이…”
  • 이민우 기자 (mwlee@sisapress.com)
  • 승인 2016.08.03 15:19
  • 호수 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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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타트업의 어두운 그림자, 공공기관에서 사업모델 베끼기도

스타트업(start-up)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안경훈 얍 컴퍼니 대표의 창업 스토리는 파란만장하다. 대기업에 다니던 그는 1999년 컨설팅 사업을 시작해 2년 만에 매출 100억원을 넘기며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2006년 이후 세 차례 창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다른 나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해법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았다.

 

안 대표는 2006년 첫 창업 당시 피처폰 기반의 모바일 전자지갑을 개발했다. 하지만 투자자를 구하지 못했다. 지인들에게 수천만원을 빌려 겨우 자본금을 댔지만 2007년 폐업하는 아픔을 겪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셈이다. 그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한 2009년 두 번째 창업에 나섰다. 오늘날 상용화된 모바일 지갑을 아이템으로 잡았지만 ‘실패한 사업가’라는 편견에 부딪혀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었다. 1년여 동안 쫓아다닌 끝에 한 이동통신 대기업과 서비스 제휴를 맺고 나서야 겨우 투자를 받았다. 어렵사리 자리를 잡자 제휴를 맺었던 대기업이 ‘직접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대기업을 믿고 자금을 지원했던 투자자들은 투자금 회수를 요청해 왔다.

 


대기업 기술 편취로 몇 해 구슬땀 수포로 

 

그는 2013년 다시 O2O(온오프라인 연계)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간 노력의 결실로 800억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했다. 하지만 네이버·카카오톡·쿠팡 등 국내 인터넷 포털, 소셜 커머스 업체가 O2O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심화됐다. 안 대표는 “세 차례 창업 경험을 하고 나니 한국 시장만 바라보다가는 작은 시장 속에서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는 것은 물론이고, 대기업들이 치고 들어오면 생태계가 교란되더라"면서 "이번에는 사업 구상 단계에서부터 한국시장이 아닌 글로벌 시장 전체를 염두에 두고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얍컴퍼니는 현재 중국, 일본 싱가폴, 유럽 및 베트남 최상위권 인터넷 사업자들과 협업을 위한 제반 준비를 해나가고 있다. 

 

흔히 스타트업 창업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한다. 그만큼 실패 확률이 높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여전히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들은 혁신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모험을 시작한다. 하지만 투자 유치부터 시장 개척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어렵사리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면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업이 뛰어들면서 장벽에 부딪히는 이들이 많다. ‘기술 베끼기’라는 한국 산업의 고질적 병폐(病弊)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카메라 앱인 ‘아날로그필름’을 서비스하는 오디너리 팩토리의 장두원 대표는 6월24일 SK커뮤니케이션즈를 고소했다. 자신의 회사에서 개발한 카메라 필터를 그대로 도용했다는 내용이었다. 앞서 SK커뮤니케이션즈는 지난 5월 ‘싸이메라’에 신규 필터를 무료로 출시했다. 이 필터는 기존 아날로그필름에서 유료로 판매 중인 아이템과 상당히 흡사했다. 필터를 소개하는 콘셉트 사진조차 아날로그필름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논란이 일자 이용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SK커뮤니케이션즈는 불과 일주일여 만에 해당 서비스를 종료했다. 하지만 싸이메라 필터가 무료로 풀렸던 탓인지 아날로그필름의 다운로드 수는 계속 감소했다. 급기야 대기업을 고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오디너리 팩토리 측 이승진 리앤킴 변호사는 “대기업이 소규모 개발자의 프로그램을 도용하는 일은 숱하게 일어나지만 이번처럼 대놓고 도용하는 경우는 없었다”며 “대기업이 소규모 개발자 프로그램을 도용하는 동종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소에 이르게 됐다”고 밝혔다.

 

최근 금융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핀테크(Fintech·금융과 기술의 합성어) 영역도 기술 베끼기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간편 송금 서비스를 시작한 카카오는 비바리퍼블리카의 ‘토스(TOSS)’ 기술 일부를 모방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간편 송금 분야는 보안카드나 공인인증서 없이 송금하는 과정에서 본인 확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난제였다. 이에 토스 측은 은행 계좌로 1원을 송금한 뒤 입금자 이름 뒤에 세 자리 숫자를 붙여 확인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뒤늦게 서비스를 시작한 카카오 송금 역시 똑같은 방식을 적용했다. 토스 측 담당자는 “카카오 송금은 토스의 1원 인증을 그대로 차용해 똑같이 따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카카오 측은 “펌뱅킹, 소액 거래를 통한 인증 등은 핀테크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술”이라며 “카카오페이 송금은 자체적으로 개발한 서비스”라고 반박했다.

 


공공기관조차 비즈니스 모델 베껴

 

보안솔루션 스타트업인 비이소프트의 표세진 대표는 우리은행과 2년여 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다. 비이소프트는 금융 사고를 막기 위해 스마트 기기를 통해 승인하는 절차를 두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후 은행과 제휴하기 위해 2014년 3월부터 우리은행에 기술에 대해 지속적으로 자료를 보냈다. 하지만 우리은행 측은 2015년 4월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며 유사한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에 대해 우리은행 측은 “해당 기술은 이미 다른 벤처기업이 독자적으로 특허출원했다가 공개된 후 거절된 기술”이라며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출시 당일까지 기술 자료를 요청한 것에 대해서도 “내부 부서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해명했다.

 

스타트업의 기술을 편취해 성장을 가로막는 역할은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스타트업을 육성하겠다는 공공기관 역시 어렵사리 자리를 잡은 벤처 기업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차용하기도 했다. 공공기관들은 비즈니스 모델의 독자성은 인정하면서도 국민 편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유사 서비스를 제공했다.

 

핀테크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금융감독원은 올해 1월 ‘금융거래 수반 주소 일괄 변경 시스템’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개인이 카드·보험·은행 등 금융사에 등록된 주소를 한 번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하지만 이 서비스는 국내 벤처기업인 짚코드가 선보였던 ‘우편물 주소 변경 서비스’와 다르지 않았다. 짚코드는 금융업체와 백화점·대형마트 등 유통업체, 이동통신사들과 제휴를 맺고 일괄적으로 주소지를 바꿔주는 서비스를 해왔다. 지금까지 누적 사용자가 380만 명이나 된다. 하지만 금감원이 똑같은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사실상 사업을 접을 위기에 처했다.  나종민 짚코드 대표는 “그동안 사용자에게는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제휴 기업에서 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올렸지만 앞으로 어떤 금융업체가 수수료까지 내면서 우리와 제휴하겠느냐”며 “이미 일부 업체가 제휴 중단을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경찰청이 인터넷 카페 등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기 거래를 예방하기 위해 2010년부터 서비스한 ‘사이버캅’ 역시 ‘더치트’라는 스타트업 기술과 유사하다. 사기 범죄 피해 사례를 데이터베이스(DB)로 쌓아 사기로 의심되는 계좌·전화번호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7월21일 박근혜 대통령이 경기도 성남시 판교 창조경제밸리에서 열린 스타트업 및 ICT 기업 관계자 간담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정부 정책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논란이 일자 금감원 측은 “짚코드는 일부 금융업체만 제휴해 전 국민이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서 “국민 편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밝혔다. 경찰청 역시 “경찰청은 실제 신고가 접수된 계좌번호를 제공해 신뢰도가 높지만 더치트에서 제공하는 사기 계좌 DB는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다”고 반박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 기업 수는 지난 2010년 8798개에서 지난해 3만1260개로 약 3.5배 증가했다. 덩치는 커졌지만 질적인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전체 벤처기업의 평균 매출액은 2010년 72억원에서 2014년 71억원으로 제자리를 걷고 있다. 평균 근로자 수는 같은 기간 27명에서 24명으로 오히려 줄었다.

 

정부는 지난 4월 스타트업을 포함한 중소·벤처기업의 기술 보호를 위해 ‘범정부 중소기업 기술보호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대기업의 기술 베끼기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영업비밀 등을 침해했을 때 손해액의 최대 10배까지 벌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영업비밀로 볼 것인지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소송으로 이어졌을 때 기술의 독자성을 판단할 기술심사 사법인력 역시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아이디어를 포함한 기술 도용 범위의 모호함, 핀테크 등 신생 기술 기반 특허 보호 방안 등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공공기관조차 거리낌 없이 서비스 베끼기를 하는 풍토 속에선 혁신적인 벤처기업이 생겨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정부가 비즈니스 모델이나 기술을 베끼면서 스타트업 육성과 창조경제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이병태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교수는 “비즈니스 모델도 기술 못지않게 보호받아야 할 지적 재산”이라며 “막강한 자금과 규제 권한을 가진 정부조차 벤처의 독창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창의적인 기업가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정부가 벤처·중소기업의 아이디어를 베끼는 것은 법적·도덕적인 측면 모두 문제가 있다”며 “정부는 민간사업을 지원하고 혁신을 진작시켜주는 정책과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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