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흘러도 잊히지 않는 이름‘푸른 눈의 독립투사’ 스코필드 박사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6.08.22 11:10
  • 호수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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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에게는 호랑이의 강인함으로 저항하며 어려운 사람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를 베풀어라”

광복 71주년을 맞이한 지난 8월15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는 올해의 타종 인사로 선정된 독립유공자 후손 등 12명이 참석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 독립유공자의 후손인 이광종·김각래·김시명씨, 장애를 딛고 국가대표가 된 ‘로봇다리 수영선수’ 김세진군, 소설가 김홍신씨를 비롯해 박원순 서울시장, 양준욱 서울시의회의장, 김영종 종로구청장 등이 모두 33번 종을 쳤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푸른 눈의 독립유공자 리사게일 스코필드다. 리사게일은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1889~1970)의 손녀다.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인물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난 스코필드 박사는 19세 때 캐나다로 유학 가서 수의학을 전공했다. 1916년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에비슨의 초청으로 한국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고, 세균학 교수이자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스코필드 박사는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장애를 얻었다. 이 때문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한 부채의식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의 소명의식으로 한국을 찾게 된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난 역사적인 1919년을 맞이하게 된다. 스코필드 박사는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갑성 선생에게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 국제정세를 세세히 알려줬고, 3·1운동 당시에는 생생한 현장 사진을 찍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또한 제암리·수촌리 마을 학살 현장을 직접 방문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정 전 총리는 “소아마비의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타고 직접 현장을 찾았고, 일제의 눈을 피해 학살 현장을 담아 외국 언론에 고발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스코필드 박사는 The Japan Advertiser, The Globe, The Seoul Press 등을 통해 일제 동화정책의 부당성과 가혹한 고문을 일본과 해외에 알렸고,  직접 일본에 건너가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 및 정계의 인물을 만나 한국에서의 폭정을 시정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가 스코필드 박사를 ‘가장 과격한 선동가(Arch Agitator)’로 낙인찍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192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 해방된 한국 땅을 다시 찾았다. 이때부터는 언론활동을 통해 민주화와 반부패 운동에 앞장섰다. 이기주의와 부패 척결을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하며 건설적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가장 강조한 것은 ‘국력 배양’이었다. 정 전 총리는 “스코필드 박사가 생전에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국력’이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셨다. 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왔던 스코필드 박사로서는 국력이 없으면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강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스코필드 박사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박애정신 또한 잊지 않았다.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 이름은 석호필(石虎弼)이다. ‘돌 같은 굳은 의지로, 강한 자에게는 호랑이의 강인함으로 저항하며, 어려운 사람이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를 베풀어라’는 뜻이다. 실제로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부터 1969년까지 50여 명의 학생에게 등록금 등 재정지원을 해 줬고, 10여 년간 150여 명의 고아들을 도왔다. 영어성경반을 운영하며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와 함께 미래의 꿈을 가르치고, 헌신과 의로움·정직함을 심어주고자 했다. 정 전 총리를 비롯해 고 김근태 전 의원,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지낸 이각범 카이스트 교수, 명품 과학 강연으로 유명한 김희준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 김윤수 뉴욕멜론은행 한국 대표 등이 스코필드의 제자들이다. 

 

8월 초 호랑이스코필드장학문화사업단이 정식 출범했다. 정운찬 전 총리(가운데)가 기념사업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고학생·고아들에게 정신적·물질적 지원 

 

스코필드 박사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정 전 총리는 “스코필드 박사가 생전에 ‘한국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치도 없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면서 “나에게 ‘빈부격차를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가르쳐주는 학과에서 공부를 하고 일생을 그런 노력을 하라’고 당부하셨다”고 말했다. 

 

올해는 스코필드 박사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보훈처는 스코필드 박사를 올해 3월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올 2월에는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고, 8월 초에는 스코필드장학문화사업단이 공식 출범했다. 장학문화사업단은 34번째 민족대표의 의미를 담아 34명의 1기 장학생을 선발했다. 스코필드 박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사회적 약자, 다문화가족, 탈북민 가족, 입양 가족 등 사회적 배려 대상자를 추가로 선발했다. 장학문화사업단은 국내 장학생 선발을 시작으로 캐나다와 미주 지역,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와 중동, 동유럽 지역의 미래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활동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정 전 총리는 “나 역시 스코필드 박사의 지원을 받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재정적 지원뿐만 아니라 정신적 지주로서 가치관 형성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정직과 정의, 박애와 사랑, 배려와 섬김, 건설적 비판정신이 스코필드 박사의 유지”라면서 “은인인 스코필드 박사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전국 독후감 대회, 국내외 스코필드 전시회,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까지 장학·문화재단 설립, 3·1운동 100주년 기념물 건립, 스코필드와 3·1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 제작에 힘쓸 계획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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