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페르난도-이사벨 부부, 에스파냐 전성기 열어 대항해 시대 개막
  • 김경준 딜로이트 안진 경영연구원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25 10:08
  • 호수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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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통일하고 아메리카로 진출하다

페르난도 2세(1452~1516)는 15세기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 속에 사분오열된 이베리아 반도 북부 아라곤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인접한 기독교 국가인 카스티야를 후일 왕위에 오르는 이사벨 공주(1451~1504)와의 결혼이라는 전략적 방법으로 통합하고 800년간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해 있던 이슬람 세력을 일소해 에스파냐 전성기를 열었다. 부부가 항해를 후원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해 대항해 시대를 개막하고 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아메리카로 진출했다.

 

오늘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고대 그리스 신화 시절부터 페니키아·그리스인들이 진출해 도시가 발달했고, 페니키아 계열 카르타고의 지배를 거쳐 기원전 3세기 포에니 전쟁 이후에 로마로 편입됐다.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후 아라비아 지역에서 등장한 무함마드가 610년 창시한 이슬람 세력은 대외확장에 나서 711년 아프리카 북단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다. 이슬람 군대는 프랑스 국경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 중앙부까지 진출했으나 732년 프랑스 중서부의 투르에서 샤를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 군대에 패배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확장은 일단락됐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서부 경계선이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접경인 피레네 산맥으로 확정된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는 이슬람과 기독교 계열 군소 국가들의 상호대립 속에 명멸하면서 전개됐다. 기독교 세력 입장에선 1492년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이 남부 그라나다(Granada)의 이슬람 나스르(Nasr) 왕조를 멸망시킬 때까지 781년간 소위 레콩기스타(Reconquista), 빼앗긴 땅의 재정복으로 일컬어지는 실지(失地) 회복 과정이었다.

 

페르난도 2세 초상화


페르난도, 이사벨과의 결혼으로 전환점 

 

8세기 초반 이슬람에 의해 북부 산악지역으로 밀려난 기독교 세력들은 718년 게르만 서고트 계열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수립해 명맥을 유지했고, 10세기에는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나바라 왕국, 11세기에는 아라곤 왕국이 생겨났다. 이베리아 반도 중남부를 석권한 이슬람 세력은 8세기 중반 코르도바를 수도로 안달루스 왕국을 세우고 번영을 누렸으나 1031년 왕과 귀족들의 내분으로 다수의 이슬람 군소 왕국으로 분열했고, 1231년 남부 그라나다에는 나스르 왕조가 성립해 이슬람의 구심점이 됐다. 기독교 계열 북부의 왕국들과 남서부의 포르투갈, 이슬람 계열 중부의 군소 왕조와 남동부의 그라나다가 혼재하던 일종의 이베리아판 춘추전국 시대는 15세기 중반에 본격적인 통일 단계로 접어든다.

 

페르난도 2세는 1452년 아라곤 왕국에서 태어나서 1461년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가 됐다. 유럽 변방 소국의 평범한 군주 후보자에 불과했던 그는 17세인 1469년 인접한 카스티야 왕국 이사벨 공주와의 결혼으로 일약 전환점을 맞았다. 이사벨은 1451년 카스티야 공주로 출생했지만 약화된 왕권에 왕실 내부의 분열이 겹쳐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복오빠로 왕위를 차지하고 있던 엔리케 4세의 견제로 유배돼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왕비였던 생모와 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며 직접 음식을 만들고 빨래와 청소를 하는 평민으로 살면서 성장했다. 엔리케 왕은 이사벨을 포르투갈이나 프랑스 왕가와 혼인시켜 자신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려 했으나, 이사벨은 대담하게 선수를 쳐서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와 결혼해 버렸다. 결혼 5년 후인 1474년 엔리케 4세가 사망하고 발생한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서 왕위 계승권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사벨은 남편 페르난도 왕자의 군사적 지원으로 승리하고 부부는 공동군주로서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다. 

 

1479년 아라곤의 후안 2세가 사망하고 페르난도가 왕위에 오르면서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실질적으로 통합됐다. 북부 기독교 세력의 양강이 합쳐지면서 레콩기스타, 기독교 세력의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은 동남부에 남아 있는 마지막 이슬람 왕조 그라나다 정벌이라는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다.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10여 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491년 대군을 이끌고 그라나다로 출정했다. 페르난도 왕이 군대를 지휘하고 이사벨 여왕이 전방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8개월간의 총력전 끝에 1492년 1월2일 그라나다를 정복하고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이슬람 세력을 축출했다. 나스르 왕조는 261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패망하면서 오늘날 관광지로 유명한 아랍 건축 양식의 알함브라 궁전을 유적으로 남겼다. 이사벨 1세는 1504년 세상을 떠났으나 남편인 페르난도 2세가 1512년 나바라 왕국을 점령해 카스티야로 병합해 포르투갈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는 에스파냐 왕국으로 통일됐다.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성취한 지리상의 통일을 종교의 통일로 연결시켜 정치적 통합성을 강화하고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형성된 서유럽 국제질서의 주역이 되고자 했다. 특히 이사벨 1세는 어린 시절 천민과 같은 불우한 생활을 하던 힘든 시절을 기독교 신앙심으로 이겨낸 개인적 신념을 사회적 제도로 만들고자 하는 순수함과 열정이 넘쳤다. 또한 오랜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온 역사에서 생겨난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의 신앙심을 넘어서 사회정책으로 추진된 종교적 순수함은 사회적 개방성을 상실하고 편협성과 이교도에 대한 박해로 연결되면서 통일대국 에스파냐가 후일 급속히 쇠퇴하는 배경이 됐다.

 

이사벨 공주 초상화


중세로 회귀한 사상적 퇴영으로 다시 몰락 

 

1489년에 설치한 종교재판소는 이교도에 대한 박해를 제도화하는 장치였고, 이후 200여 년간 유럽을 휩쓴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이라는 광풍의 진원지가 됐다. 또한 그라나다 정복 2개월 후인 1492년 3월엔 이교도의 국외 추방령을 내려 이슬람 계열의 건축·지리·과학기술 분야와 유대인 계열의 상인·금융인·의사 등 전문직 인력들을 대거 추방하면서 통일왕국을 운영할 사회·경제적 인적자원을 스스로 소멸시켜버리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정책을 시행했다. 분열된 국토를 통일하고 신대륙을 발견해 대내외 확장에 성공했지만 이를 사회 전체의 개방성과 다양성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종교적 정당성을 명분으로 이교도를 추방하고 이단을 처형하는 중세로 회귀한 사상적 퇴영으로 에스파냐는 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가 잠시 반짝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운명이 됐다. 대항해 시대의 주도국은 당초 에스파냐의 권역이었으나 종교문제로 내전을 벌여 독립한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이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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