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금빛 신화’ 뒤 빛나는 숨은 조력자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6.08.29 13:10
  • 호수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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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째 이어진 현대차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양궁 지원 화제

“(양궁 대표팀이) 부럽다. 금메달 딸 만하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여자배구 대표팀 주장인 김연경 선수가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 말이다. 리우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배구는 8강까지 올라가며 선전(善戰)했지만, 네덜란드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격수로 통하는 김연경이 있었기에 팬들은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분노로 바뀌며 대한배구협회를 향하고 있다. 이번 올림픽에 배구협회 직원은 한 명도 따라가지 않았다. 통역사가 없어 해외에서 활동 중인 김연경이 통역을 대신해야 했다. “옆에서 보기 안타까웠다”고 동료 선수들이 말할 정도다. 선수들의 체력 관리를 위해 꼭 필요한 팀닥터도 없었다. 심지어 선수들은 귀국할 때 2~3명씩 4개 조로 나뉘어 따로 돌아왔다. 선수들이 경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안 됐던 것이다. 

 

 

현대차의 3D 스캔 기술로 맞춤형 활 제공

 

관련 사실이 알려지면서 배구협회에 대한 비난 여론이 집중됐다. 한때 협회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였다. 논란이 확산되자 배구협회는 뒤늦게 해명자료를 배포했다. 협회는 “대한체육회에서 선수 12명을 빼고 경기장 출입카드(AD)를 3장밖에 할당해 주지 않았다”며 “통역이나 팀닥터를 파견해도 AD 카드 발급이 안 되기 때문에 대표팀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달랐다. 경기장에 출입하지 못해도 후방 지원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궁협회는 경기장 인근에 물리치료실과 샤워실을 갖춘 트레일러 휴게실을 마련했다. 선수들은 방탄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선수들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덕분에 양궁 대표팀은 리우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양궁 종목에 걸린 금메달 4개를 모두 획득할 수 있었다. 

 

양궁 대표팀의 전 종목 석권에는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 32년간 물심양면으로 양궁협회를 지원한 현대차그룹이었다. 그동안 협회에 지원한 금액만 450억원에 달한다. 현대·기아차의 자동차 R&D(연구·개발) 기술을 활용해 장비 성능도 업그레이드했다. 덕분에 한국 양궁은 1984년 LA올림픽부터 올해 리우올림픽까지 금메달 2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7개를 획득할 수 있었다. 

 

현대차그룹이 양궁협회를 후원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부터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양궁협회장을 맡은 직후였다. 정 회장은 취임 후 양궁의 필수 장비인 활의 국산화를 추진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양궁 활 시장은 외국 메이커가 장악하고 있었다. 신제품이 나오면 자국 선수들에게만 제공했다. 정 회장은 한국 선수들의 체형에 맞는 활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무실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양궁 관계자들을 불러 개발 상황을 체크했다. 그 결과 한국산 활은 국제대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제품이 됐다. 

 

관중이 꽉 찬 야구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는 것도 정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앞두고 토너먼트 형태로 경기 방식이 바뀌었다. 정 회장은 선수들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시끄러운 곳을 찾아가 훈련을 해 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대표팀은 사물놀이 공연장이나 시끄러운 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아다니며 훈련을 했다. 협회의 한 관계자는 “관중이 꽉 찬 야구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는 것이 지금은 필수 코스가 됐다”며 “그때 시작했던 훈련이 야구장 훈련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대한양궁협회장)이 8월7일 여자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대표팀 선수들에게 악수를 건네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양궁 사랑은 장남 정의선 부회장으로 대물림됐다. 정 부회장은 2005년 부친에 이어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았다. 정 부회장은 현대·기아차의 R&D 기술을 양궁 장비나 훈련에 활용했다. 선수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실리콘밸리의 신기술을 도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활 비파괴 검사가 대표적이다. 양궁 활의 날개(림)는 서로 다른 5종의 재질로 돼 있다. 육안으로 이상이 있는지 알기 쉽지 않다. 실제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남자양궁의 간판이던 박경모 선수의 활이 갑자기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파괴 검사는 신차 개발 때 부품들의 이상 여부를 확인하는 기술이다. 3D CT 장비를 사용해 선수들의 활 내부를 정밀 분석하는 것이다. 

 

 

한화·KT·SK 등도 사격·펜싱 지원해 효과

 

선수들 개인에 맞는 맞춤형 그립도 제작했다. 활의 중심에 덧대는 그립은 보통 자신의 손에 맞도록 직접 손질한다. 양궁협회와 현대차그룹은 현대·기아차의 3D 스캔 기술을 활용해 선수의 손에 꼭 맞는 맞춤형 그립을 제공했다. 이 밖에도 불량 화살을 걸러내는 ‘슈팅머신’과 실리콘밸리의 뇌파 분석 기술을 훈련에 도입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가장 집중력이 높은 상태인지 분석해 훈련에 활용했다. 양궁 대표팀이 올림픽 때마다 꾸준히 금메달을 따는 것도 현대차그룹의 숨은 조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내 스포츠를 후원하는 기업은 현대차뿐만 아니다. 올해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성과를 낸 사격과 펜싱도 기업의 체계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한화그룹 계열사인 한화갤러리아백화점은 2002년부터 대한사격연맹 회장사를 맡고 있다. 황용득 한화갤러리아 대표가 연맹 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지난 15년간 지원한 발전기금만 125억원에 달한다. 50m 남자 권총에서 진종오 선수가 올림픽 3회 연속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경기 직후 황 대표를 통해 축전을 전했다. 진종오 선수는 현재 KT 사격선수단에 소속돼 있다. 때문에 KT는 스위스 총기회사와 함께 진종오만을 위한 권총을 제작했다. 황창규 KT 회장은 진종오 선수에게 홀로그램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SK그룹은 핸드볼과 함께 펜싱을 지원하고 있다. 펜싱협회장이나 핸드볼협회장 역시 최대원 회장을 포함해 SK그룹 출신 인사가 맡고 있다. 이번에 여자핸드볼은 아쉽게도 결선 토너먼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박상영이 남자펜싱 에페에서 역전 금메달을 땄다. SK에서 펜싱 경기장 3분 거리에 아파트 한 채를 임차해 이동거리를 최소화한 결과였다. SK는 펜싱 영상분석관과 영상분석 프로그램 구입, 3D 모션 캡처 기술을 활용한 훈련도 지원했다. 스포츠계의 한 관계자는 “새로운 선수를 선발하고 뛰어난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현재 기업이 대신하고 있다”며 “한국 스포츠의 위상이 지금보다 높아지려면 나머지 종목에도 기업들의 조력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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