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명이 900명 수화를 담당하니 24시간이 모자라요”
  • 구민주 인턴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3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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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아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돕는 수화통역사들

번화한 서울 이태원 중심가. 그곳에는 번잡한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낡고 작은 건물 하나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용산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수화 활동의 통역을 돕는 수화통역센터다. 이곳을 들어서면 소리만 사라져 있을 뿐, 바깥 분위기 못지않게 분주하다. 학교 장학금 신청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청각·언어장애인(농아인)부터 화상전화로 업무를 보는 수화통역사까지.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이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같은 역할을 하는 수화통역센터는 서울시 25개 자치구에 하나씩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 소속된 수화통역사들은 직접 찾아오는 농아인들을 돕거나 통역이 필요해 전화 신청하는 사람들과 직접 동행한다. 주로 관공서나 병원, 은행 등을 함께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기관들은 대부분 수화통역사를 고용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농아인들은 어딘가를 방문하기 위해 매번 수화통역사와 일정을 조율해야 한다. 기자가 방문한 이날, 센터 한편에 걸린 외근 시간표에는 치과 방문을 비롯해 여러 동행 일정들이 적혀 있었다.

 

서울 이태원 번화가 사이에 용산구 수화통역센터가 위치해 있다.


센터 당 통역 인력 3명, 밤이나 주말엔 더 적어

 

용산구에는 현재 약 900명 이상의 농아인이 거주한다. 하지만 센터에 배치된 담당 인력은 고작 3명이다. 운영 규정상 용산구로 용무를 보러 오는 타 지역 농아인의 통역 지원도 나가야 한다. 그러다보니 수화통역사의 하루 일정은 빽빽할 수밖에 없다. 

 

일단 시급한 요청부터 순서대로 들어주고, 일정 조정이 어려우면 화상으로 통역을 대신한다. 홍경화 수화통역사는 “인력 충원은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부분이지만, 당장 기본적인 운영비도 부족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나마 이런 서울의 상황이 나은 편이다. 타 지역의 상황은 더욱 어렵다. 5명 미만이 배치된 단 하나의 센터가 전 지역을 담당하는 도시도 있다.   

 

밤이나 주말의 경우는 수화통역사 한 명이 담당해야 할 범위가 더 넓어진다. 서울농아인협회 소속의 비상근통역사 5명이 서울시 전체를 책임지게 된다. 응급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면 모든 곳을 찾아갈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정말 급한 일이 생긴 농아인들은 야간 담당보다 평소 교류했던 관할 지역 내 수화통역사를 먼저 찾곤 한다. 홍 통역사는 “근무 시간이 아닌데도 긴급 요청을 받고 급히 집을 나선 일이 적지 않다”며 “오죽 답답했으면 그 밤에 전화를 했겠나 싶다”고 말했다.

  

수화통역사의 업무는 예측이 어렵다. 예를 들어 농아인들은 경찰서 출입이 적지 않다. 비장애인들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크고 작은 마찰을 빚은 탓이다. 그때마다 통역사들은 가족보다 먼저 이들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상황을 수습한다. 긴급한 상황이 아니어도 출동하는 경우가 많다. 휴대전화를 사러 가거나, 집에 냉장고 수리사가 방문할 때도 농아인들과 함께한다. 심지어 수화를 못하는 친척을 만나 중요한 대화를 나눠야 할 때도 통역을 맡는다. 일상 다방면에서 이들을 돕는 만능 해결사인 셈이다. 

 

자연히 이들은 농아인들의 삶 일거수일투족을 누구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그만큼 감정적 공감과 교류도 가장 짙다. 그 때문에 수화통역사는 때에 따라 농아인들의 분노나 답답함 등의 감정까지 대신 전하기도 한다. 이들이 알리고 싶은 감정까지 고스란히 표현해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수화통역사의 임무라는 게 홍 통역사의 생각이다.

 

홍경화 수화통역사가 청각장애인 부부의 집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바쁜 세상, 농아인 기다려 줄 여유 없어 

 

자연스레 이들은 농아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관공서나 병원을 동행했을 때 농아인이 수화를 끝내기도 전에 통역사에게 바로 용건을 묻기도 하고, 통역하는 시간조차 채 기다려주지 않을 때는 가슴 아프다. 실제로 이런 경험들이 상처로 쌓여 방문을 피하거나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농아인들도 적지 않다. 

 

청각·언어 장애를 갖고 있는 하규석씨(가명·51세)는 “일상생활에서 겪는 무시와 차별로 자주 서러움을 느낀다”면서 “일정상 수화통역사 없이 혼자 용무를 보러 가는 경우에는 더 심해진다”고 말했다. 홍 통역사는 “사람들은 청각 및 언어 장애를 다른 장애에 비해 편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들이 느낄 소통의 답답함을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아량이 아직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2014년 말 기준 청각․언어장애를 갖고 있는 국민은 27만여 명이다. 입으로 말하는 세상에 손으로 말하는 이들의 소통은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을 풀어줄 단초가 될 법이 올해 8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한국언어수화법은 농아인들이 제1언어로 사용하는 수화를 공용어로 지정했다. 국어와 동등한 위치에 올라선 만큼 농아인들의 삶에도 질적 변화가 시작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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