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테르테 통치의 뿌리는 마르코스에 있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09.06 09:32
  • 호수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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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 만능주의’ 펼치는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철권통치 뿌리는 ‘마르코스式 통치’

마약범 2000명이 죽었고, 70만 명이 자수했다. 법보다 주먹을 내세운 두테르테는 세계적 인물이 됐다. 그는 ‘새로운 변화’를 필리핀에 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하며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그의 통치는 필리핀의 피플파워를 불러왔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난 내 생각을 말하는 걸 전혀 꺼려하지 않는다.”

로드리고 로아 두테르테(Rodrigo Roa Duterte) 필리핀 대통령은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는데도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떤 질문을 던져도 피하지 않는다. 원래 이런 정치인은 살아남기 어렵다. 뱉었던 말에 도로 공격받고, 가볍고 설익은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다. 정치로 대성하기에는 결격 사유다. 그런데 대통령이 됐다. 그것도 압승했다. 전체 투표자의 39%인 1500만여 명이 그에게 표를 던졌다. 차점자인 로하스 전 내무장관이 얻은 표는 950여 만 표였다. 승리를 등에 업은 두테르테는 자기가 내뱉었던 말들을 지금 현실에서 이루고 있다.

 

“취임 6개월 내에 범죄를 뿌리 뽑겠다” “경찰을 3000명 늘리고 급여도 갑절로 올려주겠다” “범죄자 10만 명을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하겠다” “경찰이나 군인이 마약상을 붙잡으면 포상금을 주겠다”. 그리고 2000명의 주검이 거리에서 생겼다.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2개월 만에 살해된 마약범 숫자다. 

 

“쏴라. 그러면 내가 포상하겠다” “사살해도 좋다”. 두테르테의 공개적인 허락과 격려를 얻은 경찰과 군대. 이들로 이뤄진 죽음의 분대는 지금 마약 전쟁을 진행 중이다. 정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자의 결재가 떨어지자 공식과 비공식을 가리지 않고 범죄에 가담한 모든 이를 말살할 듯이 덤벼들고 있다. 필리핀 거리에는 지금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들이 ‘마약 밀매자’라는 표식을 달고 발견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2016년 8월2일 필리핀 케손시티의 군인병원을 방문한 두테르테. 병사들과 함께 뻗은 ‘주먹’은 두테르테의 트레이드마크로 ‘범죄와의 전쟁’을 뜻한다. © EPA 연합


“우리 아버지는 마르코스 보이였다”

 

“나는 마르코스가 아니다.” 

사우디아리비아에 파견됐다 돌아온 필리핀 노동자들을 환영하기 위해 아키노 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선 두테르테는 자신과 마르코스를 연결 짓는 시선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들은 내가 마르코스를 따라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내 의무를 수행할 뿐이다.” 두테르테의 반대편에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1986년 피플파워를 통해 축출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그가 흉내 내고 있다지만, 그는 마르코스와 자신이 연결되는 게 싫은 듯했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변화다. 

 

필리핀에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초법적 살인이 일어난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3000명. 두테르테의 지금보다 좀 더 많은 숫자의 살인이 마르코스 시절 벌어졌다. 필리핀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피플파워가 필리핀에서 일어난 건 마르코스가 남긴 ‘유산’이었다. 두테르테는 거부하지만 그는 마르코스의 패턴을 따라 그리고 있다. 후보 시절 그는 마르코스와의 만남을 여러 차례 되짚어보곤 했다.

 

“그는 진실한 마르코스 보이였다.” ‘필리핀스타’와의 인터뷰에서 두테르테는 자신의 아버지를 독재자에게 진실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두테르테의 고백은 계속된다.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된 첫해, 민다나오(필리핀 남부 지역으로 두테르테 일가는 1951년 이 지역에 위치한 다바오시(市)에 정착했다)에서는 모두가 자유당(야당)에 줄 섰지만 단 두 명만이 마르코스 곁에 서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내 아버지(비센테 두테르테)였다.”

 

“나는 마약거래상입니다(Pusher Ako)”란 팻말 옆에 숨진 한 남성. 옆에서 오열하는 그의 아내는 남편이 마약거래상이 아니라고 로이터통신에 항변했다. © EPA 연합


두테르테가(家)는 비사야족이다. 필리핀은 말레이계 타갈록족과 폴리네시아계 비사야족이 인구의 다수를 이룬다. 타갈록족은 주로 필리핀 북쪽의 큰 섬 루손에 많은데, 이곳엔 수도인 마닐라가 위치해 있고 필리핀의 정치·경제 권력이 집중돼 있다. 자연스레 타갈록족은 필리핀의 중심 세력이다. 반면 비사야족은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에 많다. 타갈록족은 타갈로그어를 쓰지만 비사야족은 비사야어를 따로 쓴다. 인종적 특징도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다. 

 

두테르테의 아버지인 비센테 두테르테는 변호사 출신이었는데, 다바오시가 다아보주(州)에서 분리되기 전 주지사를 지냈다. 그리고 마르코스가 집권한 1965년에는 내각으로 들어가 행정비서관을 지냈다. 마르코스의 정치적 동지였던 셈이다. 두테르테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마르코스에 대한 정치적 동지 의식을 갖고 있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아버지가 마르코스와의 우정과 충성을 말했다”고 했고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두테르테는 말을 이었다. “마르코스는 필리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로 범죄를 해결하는 나의 통치철학은 마르코스의 것이다. 그는 그가 생각하는 국가 통치를 위해 정부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두테르테는 그러면서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한 1972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필리핀은 깨끗했다.” 

 

마르코스는 1972년부터 1981년까지 필리핀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독재 정권을 강화했다. 비슷한 시기 두테르테는 아버지처럼 법률을 공부했다. 필리핀 산베다대학 법대를 졸업한 뒤 197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77년 다바오시에서 검사를 지냈다. 마르코스의 계엄령 시대와 두테르테의 검사 시절은 겹친다. 이 시기 필리핀의 사법 권력은 마르코스 정권의 뜻에 따라 반(反)마르코스파를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하던 때다. 두테르테가 여기에 호응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검사로 마르코스의 계엄령 시대를 지낸 이 시기가 두테르테 정치의 밑바탕이 됐을 거라고 해석한다.

 

그는 아버지처럼 다바오를 정치적 터전으로 삼았다. 하원의원과 시장을 역임했다. 1988년 처음 다바오 시장이 된 뒤 3선 연임 불가 조항 때문에 하원의원과 부시장을 지냈을 때를 제외하면, 항상 다바오의 수장에는 그가 있었다. 다바오는 그에게 마르코스주의(主義)의 시험장이었다. 여러 가지 정책이 강하게 추진됐다. 공무원의 부정과 부패를 강하게 박멸했고 다바오 시내 도처에 CCTV를 배치해 방범시스템을 향상시켰다. 차량 속도 제한을 도입해 시가지에서는 30km 이상 속도를 내지 못한다. 공공장소와 시설에서 흡연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2002년 미국처럼 ‘911서비스’를 도입한 건 다바오시가 필리핀에서 최초다. 새벽 1시부터 오전 8시까지 주류 판매를 금지했고 쓰레기 분리수거 제도도 도입했다. 강화된 공공서비스는 다바오를 필리핀의 여타 도시와 차별화시켰다. 

 

8월26일 필리핀 경찰청사 앞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초법적 처형과 잔혹 행위의 종식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 AP 연합


“치안만 나아지면 다 따라온다”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치안에서 드라마틱하게 일어났다. 두테르테와 그의 지지자들은 두테르테 이전 다바오시의 혼란을 설명하며 두테르테 통치를 정당화한다. 다바오시는 두테르테가 시장이 되기 전까지 살인과 마약, 강간 등 강력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곳으로 필리핀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해가 지는 오후 8시 이후가 되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은 곳이 다바오였다. 하지만 그가 시장에 당선되고 나자 상황은 변한다. 두테르테는 강력한 단속으로 범죄자와 마약 사용자를 숙청했다. 다바오를 필리핀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지금 다바오는 필리핀인이 거주하고 싶은 도시로 첫손에 꼽힌다. 

 

사회간접자본(SOC)사업을 위해 2013년 다바오를 찾은 한국인 사업가는 “마닐라에만 도착해도 당장 택시 타는 것부터가 스트레스다. 외국인 상대로 바가지요금이 심한데 다바오는 아무 말 없이 미터기를 켜고 가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이었던 두테르테를 만날 기회가 잠깐 있었는데, 두테르테의 철학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고 했다. “치안만 나아지면 나머지는 따라온다. 다바오가 안전한 곳이라고 알려지면 자연스레 투자가 이뤄지고 도시는 발전하게 돼 있다.”

 

하지만 다바오가 얻은 가시적인 안정 뒤에는 ‘검은 의혹’이 있다. 다바오시는 필리핀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도시다. 여기에 민다나오 섬 북부와 서부는 민족 간 충돌이 있고 NPA라는 공산반군이 존재한다. 치안을 유지하기에 매우 불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극복 가능하게 했던 것 중 하나가 자경단(Davao Death Squad)이다. 인권감시단체에 따르면, 1998~2015년 사이 약 1424명의 범죄자가 자경단의 손에 의해 처형됐다. 이 중 14건은 신원을 잘못 파악해 생긴 실수였다. 결과적으로 일종의 암살 분대가 다바오의 비공식적 치안을 맡았던 셈이다. 필리핀 독립언론인 ‘라플러’는 “두테르테는 자경단과의 관계를 부인했다. 하지만 다바오 시장 시절 체포를 거부하는 용의자에게 총을 쏴도 된다고 허가했다”고 전했다.

 

단호하게 철권을 휘둘러 무서울 것 같은 그가 어떻게 대통령이 됐을까. 의외로 농담도 잘하고 인간미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로 대중에게 비쳐져서다. ‘라플러’의 피아 라나다 기자는 두테르테를 대선 기간에 쫓아다니며 수많은 연설을 들었다. “매력적이다. 메모를 해서 읽는 것도 아니다. 청중에게 맞게 농담과 발언을 조절한다. 중산층 이상이나 대학생들 앞에서는 영어로 말하고 빈곤층들을 모아놓고는 타갈로그어나 비사야어로 말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의 연설을 들으며 10번 정도는 낄낄대고 웃을 수 있다.”

 

웃음 속에 강조하는 메시지는 범죄·마약과의 전쟁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마닐라 중심주의를 벗어나 다른 지역도 동등하게 대해 달라고 호소했다. 라나다 기자는 “다른 후보들은 유세에서 자신의 상징색 깃발을 들지만 두테르테는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며 필리핀 국기를 소품으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다바오에서의 실적은 그를 남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후보로 만들었고, 비사야족이라는 점은 필리핀 정치를 지배해 오던 타갈록족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압도적인 표 차이는 그렇게 발생했다.

 


“독재? 하지만 부패는 멈추겠지”

 

대통령이 된 지금, 두테르테의 마르코스주의는 이제 도시를 넘어 전 국가로 확대 적용되고 있다. 필리핀의 정당 시스템은 매우 유동적이다. 그렇다 보니 선거가 치러지고 난 뒤 당선된 대통령의 정당으로 국회의원들이 이동하는 당적 변경이 흔하게 이뤄진다. 정당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보다 후보자 개인 인격과 그들이 지침처럼 내거는 슬로건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두테르테가 승자가 된 대통령 선거에서 베니그노 아키노 전 대통령의 후계자였던 마누엘 로하스 전 내무장관은 범죄와의 전쟁을 이야기하며 ‘성실한 길’을 내걸었다. 또 다른 후보 제조마르 비나이 당시 부통령은 빈곤층에 대한 복지를 약속하면서 ‘비나이가 있으면 생활이 좋아진다’고 호소했다. 국민배우의 딸인 그레이스 포 상원의원은 ‘유능하고 부드러운’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기존의 정치를 일신하는 청렴결백을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두테르테는? ‘대담하고 곤란한 사람과의 동행’을 말하며 혼란과 부패로 가득 찬 정치를 변혁하겠다고 선언했다. 필리핀의 ‘대담하고 곤란한 사람과의 동행’은 어떤 결말을 가져올까. 두테르테가 후보 시절 가장 많이 언급했던 단어 중 하나는 ‘독재(dictatorship)’였다. 

 

“(만약 대선에서 이긴다면) 독재가 될 것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부패는 멈추겠지.”

‘라플러’와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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