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석 변호사의 생활법률 Tip] 4대강 사업과 공동체의 행복
  • 박현석 변호사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1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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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동체의 전체 구성원이 모두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서양에서는 이런 곳을 유토피아라고 불렀다. 언어학적 분석에 대단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무(無)라는 의미의 ‘유(ou)’와 장소를 의미하는 ‘토포스(topos)’라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이라는 사실은 많이 알고 있다. 즉 옛 사람들도 사회구성원 전체가 행복하게 사는 곳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제레미 밴덤의 공리주의 다음에 존 스튜어트 밀의 논의가 이어지는데 밀의 주장이 정의에 관한 것인지는 의문이 있다. 객관적인 정의의 관점에서 봐도 밀의 주장이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권리와 의무의 올바른 분배원칙에 관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존 스튜어트 밀은 부친의 엄격한 교육 덕택에 철학․윤리학․정치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해 발군의 업적을 쌓았다. 그는 평생 동안 방대한 저작을 했고 자유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샌델 교수의 위 책에는 밀의 자유론의 일부가 인용되고 있는데 자유와 정의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밴덤의 주장은 단순명쾌해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그 공동체가 취해야 할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강점이 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나 실제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상황에서 밴덤의 논리로는 상대방을 설득하기가 어렵다. 밀은 공리주의를 원칙적으로 긍정하면서도 공리는 매 순간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수가 반대 의견을 막거나 자유사상가를 검열할 수 있다면 오늘 당장 공리가 극대화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불행이 늘고 행복은 줄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하고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살도록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라는 게 밀의 주장이다. 즉 공리를 재해석함으로써 벤덤의 약점 중 하나인 개인의 권리문제를 비켜간다. 그리고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고 봐 고급쾌락과 저급쾌락으로 쾌락을 분류해 벤덤의 약점을 보완했다.

 

4대강 사업 공사현장 ⓒ 시사저널 유장훈


샌델 교수는 이러한 밀의 논의를 정의의 한 학설로 설명하고 있다. ‘저게 무슨 정의야’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정의(正義)를 적극적으로 정의(定意)하는 것의 어려움은 지난 글에서 한스켈젤의 말을 인용하면서 기술한 바 있다. 밀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밀은 정의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정의하기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보면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행복이 가장 극대화될 수 있다는 간접적인, 내지 형식적인 정의(定意)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밴덤식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선에 빠지기 쉽다. 내가 생각할 때는 이 일로 국가 공동체 전체의 행복이 극대화 될 수 있으니까 내가 하는 일을 말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보다는 밀어붙이기식으로 정책을 시행한다. 수년 전에 있었던 4대강 사업을 보면 밀이 염려했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개인의 자유, 특히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고 공리라는 것은 매순간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지적은 대철학자의 묵직한 한 수로 느껴진다.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온 강이 녹조로 채워지고 식수를 구하기 어려워하는 현실을 보면서 한정된 재원을 분배할 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고, 쾌락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쾌락을 평가해야 한다는 밀의 주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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