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위안부’, 그 생존의 기억》 #9. 아메리칸타운과 이름 없는 그녀들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6.09.3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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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군산 아메리카타운을 가다

40년 전 그곳에 ‘이름 없는’ 여성들이 살았다. 수인(囚人)번호처럼 방 번호가 그녀들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곳에서 여성을 ‘X번 방 여자’로 호명한 이는, 주한미군이었다. 

 

군산 아메리칸 타운 입구 ⓒ 시사저널 박준용

2016년 9월17일, 40년 전 ‘이름 없는’ 여성이 살았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곳은 전북 군산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데 있었다. 시내에서 차로 15분 정도 달리자 주변에 듬성듬성 농가가 이어졌다. 그러다 그곳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국제문화마을로 이름을 바꾼, 군산 산북동의 기지촌 ‘아메리칸타운(이하 A타운)’이다. 인근 미 공군부대를 위해 국가가 계획적으로 조성한 마을이다. 

 

《’미군위안부’, 그 생존의 기억》 #2. 민간이 대리하고 국가가 방치했다 보기

 

군산 아메리칸 타운 입구 ⓒ 시사저널 박준용

 

‘WELCOME TO INTERNATIONAL CULTURE VILLE', ’GOLDEN xxBAR', 'LA xx CLUB'…. 마을 입구부터 시작된 영어간판의 향연은 한적한 농촌인 인근 풍경과 대비를 이뤘다.


A타운 입구 주변에서 만난 주민에게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를 취재하러 왔다”고 하자 곧장 “마을 뒤편으로 가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미군을 상대하는 것으로 보이는 클럽, 술집, 음식점 등의 사이로 마을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마을 중반부의 야트막한 오르막을 넘어서자 상인이 그저 ‘뒤편으로 가보면 안다’고 말한 이유를 알았다.
 

군산 아메리칸 타운에 남은 '닭장 집'의 흔적

군산 아메리칸 타운에 남은 '닭장 집'의 흔적 ⓒ 시사저널 박준용


마을 뒤편에는 큰길 좌우로 도열한 수백 개의 빈방이, 40년 전 ‘이름 없는’ 여성들이 이곳에 살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방은 3미터 정도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내부는 좁디 좁다. 16㎡(5평) 남짓 될까. 그래서 이곳의 별명도 ‘닭장집’이다. ‘닭장집’은 지금 폐허로 방치돼 있다. 큰길을 계속 따라 마을 뒤편 끝까지 가면 담벼락과 마주한다. 둘러보니 담장은 마을 뒤편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담장은 마을 전체를 감쌌다.

A타운의 ‘닭장 집’은 수많은 인권유린의 흔적이다. 기지촌 여성 김연자씨의 증언은 이를 말해준다.

 

“1976년부터 그녀(기지촌 여성 증언자 김연자씨)는 군산의 아메리칸타운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군산은 송탄이나 동두천의 기지촌과는 달리 기지촌 여성에 대한 통제가 심했던 곳이었다. 민간인과 기지촌 여성이 한 동네에 살았던 다른 기지촌과는 달리, 기지촌 여성들을 방 번호가 붙은 소위 ‘닭장 집’에 집단 수용해놓고 집 근처에는 높은 담을 치고 경비가 지켰다. (중략) 그녀는 그 때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는데, 드러나지 않은 ‘윤금이’들이었다.”
- 정희진《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닭장 집’은 군산 A타운이 정부 주도로 조성됐다는 단서기도 하다. 

 

“일명 ‘실버타운’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정부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50% 지원하고 포주가 50%를 투자한 실제 주식회사 형태의 ‘여자 파는 회사’였다.”
- 정희진《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군산 아메리칸 타운 ⓒ 시사저널 박준용​

 

5․16 군사쿠데타에 참여한 백아무개 대령은 A타운의 첫 주인이었다. 1970년대부터 이곳에 터전을 잡은 한 상인은 마을 어귀에서 기자에게 “백 대령이 1969년에 1만평 부지를 매입해 이곳을 만들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A타운을 운영하는 주인은 계속 바뀌어서 지금은 정권과 관계없는 민간인이 지분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백 대령 이후로도 70~80년대 정권과 관계된 사람이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했다. 


이 상인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 400~500명의 여성이 ‘닭장집’에 있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주말 밤이면 A타운은 화려한 네온사인들로 불야성을 이뤘다. 하지만 인근 미군부대의 정원이 축소되자 마을의 면모가 크게 변했다. 몇몇 클럽이 문을 닫았고, ‘닭장 집’은 그대로 빈방이 됐다. 2011년 A타운은 ‘국제문화마을’로 이름을 바꿨다.

 

 

군산 아메리칸 타운 ⓒ 시사저널 박준용

 

 

규모가 줄었지만 A타운의 몇몇 클럽은 현재도 미군을 상대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1975년부터 A타운에서 장사를 했다는 J씨는 “지금은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여자가 없다”면서 “대신에 필리핀,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여자들이 와 있다. 합치면 100명이 넘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마을 뒤편을 둘러본 뒤 입구로 돌아오는 길, 인적 없던 ‘닭장 집’ 근처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외국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시곗바늘은 오후 7시를 가리켰다. 클럽들이 하나 둘 네온사인을 켰다. 마을 입구에는 A타운으로 미군을 실어 나르는 군 전용택시가 바쁘게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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