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미폰 태국 국왕의 빛과 그림자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10.14 10:5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 최장수 국왕이라는 기록을 가진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이 10월13일(현지시간)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푸미폰 국왕은 1946년 6월9일부터 70년 126일간 왕위를 유지해왔다. 

 

태국은 입헌군주제 국가다. 태국의 정식 국명은 ‘Kingdom of Thailand’다. ‘킹덤(Kingdom)’이 붙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왕국’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거리 곳곳에서는 국왕과 왕비의 얼굴이 방콕을 방문한 여행객을 환영한다. 

 

태국에서 푸미폰 국왕은 여러 의미를 갖는 인물이었다. 푸미폰 국왕은 국민의 95%가 불교신도인 이 나라에서 불교의 최상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일종의 신(神)적인 존재로도 인식됐다. 역사적으로 태국은 크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왕은 신이다’라는 개념이 존재했고 희석됐더라도 그 바탕은 남았다. 그리고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의 아버지였다. 

 

 

신적인 존재이자 국민의 아버지

 

‘왕=아버지’라는 등식을 만든 건 푸미폰 국왕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태국의 지방을 돌며 국민들을 만나고 대학 졸업식에 참석해 젊은이들을 만나며 친숙한 왕으로 다가서려고 했다. 직접 얼굴을 내밀지 못하면 브라운관에라도 등장하는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태국의 이상적 공동체는 ‘므앙’(도시국가)인데 푸미폰 국왕의 태국은 그런 공간이었다. 

 

태국의 현대사에 푸미폰 국왕은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1973년 군부의 집권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을 때 수배를 받던 학생들을 보호했던 이가 국왕이었다. 1992년 수친다 크라프라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수친다 장군의 총리직 사임과 해외 망명을 이끌어낸 것도 국왕이었다. 국왕이 국민을 등에 업고 군부와 맞설 수 있었던 까닭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태국 사회에서 쉽게 꿈꾸지 못할 일이었다. 태국 사회가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두고 국민갈등을 벌였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유일하게 국왕에 도전하는 존재, 절대적 권위에 고개를 드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세계 최장 재위 기록을 가진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이 10월13일(현지시간) 서거했다고 왕실 사무국이 밝혔다. 향년 88세. 푸미폰 국왕은 1946년 6월 9일부터 이날까지 70년 126일간 왕위를 유지해왔다. 사진은 푸미폰 국왕이 입원한 방콕 시리라즈 병원 앞에서 이날 태국인들이 국왕의 초상화를 품에 안은 채 슬퍼하는 모습. ⓒ 연합뉴스

 

‘레드셔츠’(親탁신파)와 ‘옐로셔츠’(反탁신파)의 갈등은 2006년 9월19일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시작됐다. 당시 군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탁신의 국왕 모독’이었다. 물론 군부의 변명일 수도 있지만 탁신 지지자 중 일부가 ‘탁신 대통령’을 주장했고 이는 ‘입헌군주제 폐지, 공화국 전환’이라는 뜻으로 해석됐다. 왕을 없애자는 주장이니 결국 국왕 모독이었다. 그렇다고 레드셔츠가 국왕을 싫어했냐면 그건 아니다. 3년 전 태국에서 만난 친탁신파 그룹은 “우리도 국왕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군부의 개입이 잦고 그러다보니 정국이 자주 혼란스러운 태국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는 국왕이었다. 국민들은 푸미폰 국왕이 태국 정치를 좀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존재라고 칭송하며 절대적인 믿음을 보냈다. 태국 전역에서는 오전 8시와 오후 6시, ‘국왕 찬가’가 흘러나오면 행인들이 가던 길을 멈춘다. 태국 국가보다 더 유명한 국왕 찬가다. 

 

그런데 친숙하지만 친숙할 수 없는 게 태국의 국왕이다. 국왕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쉽게 꺼내기 힘든 게 태국이다. 학계에서도 국왕, 그리고 국왕을 보좌하는 추밀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란 쉽지 않다. 태국 사회의 금기를 건드렸다간 태국 형법 112조에 의해 처벌받는다. 이 법으로 적용받는 죄목은 ‘국왕모독죄’다. 경찰에서 왕실 모독죄를 범할 수 있는 학생 모임을 감시해달라며 대학 본부에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일종의 학원사찰이 벌어지는 셈이다.

 

과거 왕실 모독법은 만능법이었다. 태국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흘러나오는 ‘국왕 찬가’ 시간에 기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태국인 남성이 체포된 적도 있고, 휴대전화로 왕실을 비판하는 단문 메시지를 보낸 60대 태국 남성은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옥사하는 일도 있었다. 과거 군부 쿠데타를 막아내며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던 푸미폰 국왕의 존재가 역설적으로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를 가로막는 역할을 수행했다.

 

 

1992년 쿠데타를 일으킨 수친다 장군의 총리직 사임과 해외 망명을 이끌어낸 것도 국왕이었다. ⓒ 유튜브 캡쳐


왕세자? 후계를 걱정해야 하는 태국 국민들

 

이제 푸미폰 국왕이 서거했으니 태국 국민들은 다음을 고민해야 될 시기가 됐다.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지만 뭔가 문제가 생기면 왕실의 위엄에 의지해 해결했던 게 태국식 민주주의의 독특한 점이다. 반대로 말하면 푸미폰 국왕의 개인 자질에 기댔다는 얘기도 된다. 

 

일단 태국의 왕위 계승 절차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과거 라마 8세가 사망한 뒤 푸미폰 국왕(라마 9세)이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70년 전 일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조차도 드물다. 

 

현행 태국 헌법에 따르면, 왕위를 잇는 후계자가 지명되면 국회에서 승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만약 선대가 지명하지 않았다면 추밀원이 추천하게 된다. 푸미폰 국왕은 지난 1972년 와치라롱껀(64)왕자를 후계자로 공식 지명했다. 

 

1974년 개헌할 때 왕위 계승 관련 규정에는 공주도 국왕의 정치 자문단인 추밀원의 추천과 의회 승인 절차를 거쳐 왕위 승계자가 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왕자뿐 아니라 공주도 지명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왕위 계승 논란이 일 경우 생길 세력 간 알력 다툼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태국 국민들 중 상당수는 왕세자의 방탕한 생활을 기억하고 있어 인기가 높지 않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탁신 전 총리가 스폰서 역할을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래서 추밀원이 왕세자를 후계자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마하 짜크리 시린톤 공주(57)도 왕위를 물려받을 수는 있다. 1974년 개헌 당시 명백한 후계자가 없을 때는 공주도 왕위 승계자가 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시린톤 공주는 타국 왕실과의 외교에 국왕 대신 파견될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 6개 국어를 구사하는 그녀의 인기는 왕세자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높다.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국왕을 보좌하는 자문단인 추밀원, 그리고 승계자를 승인할 수 있는 의회 등 왕위 승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단들의 셈법에 따라 마치 복잡한 태국 정치처럼, 복잡한 왕위 승계가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