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찰이 주는 교훈 "권력을 털어야 신뢰 얻는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11.21 14: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쿄지검 특수부가 우리 검찰에 전달하는 메시지

한때 일본 검찰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국민이 신뢰하는 곳을 꼽는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달리던 때였다. 검찰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는 우리네 현실에서는 믿기 힘든 조사결과다. 일본 검찰, 좀 더 압축하면 도쿄지검 특수부는 그동안 전직 총리를 비롯해 고위 공직자와 실세 국회의원들을 옭아매면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권력의 저승사자'였고 신뢰 상승의 1등공신이었다. 최근에는 도쿄지검 특수부의 몰락을 이야기하며 신화가 퇴색했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도 권력에 대한 감시로, 그리고 국민이 갖는 믿음으로 높은 명성을 쌓았던 건 사실이다.

 

일본 검찰의 쇄신을 말할 때는 그 시작점을 보통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구속으로 잡는다. 당시 도쿄지검 특수부를 특별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1976년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록히드 사건’이다. 록히드 사건의 발단은 록히드 마틴이 만든 제트 여객기 L-1011 트라이스타부터 시작됐다. 군용기는 선두주자였지만 항공기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록히드마틴은 트라이스타라는 민항기를 야심작으로 내놨다. 문제는 이걸 팔아야 했다. 군용시장과 달리 민간 시장에서는 보잉, 맥도날 더글라스와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11월20일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을 최순실과 공모자로 인정하며 '피의자'로 규정했다. © 시사저널 고성준

경제 호황에 올림픽 특수까지 있던 일본은 항공기 시장에서 중요한 타깃이었다. 당시 전일본공수(ANA)는 이미 맥도날 더글라스의 DC-10을 발주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와카사 토쿠지 ANA사장은 록히드마틴의 트라이스타를 발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74년 정식으로 비행기를 받아 운항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전혀 게이트가 될 것 같지 않던 일본 내부와 달리, 이 문제는 미국에서 먼저 터져버렸다. 1976년 2월4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 소위원회의 공청회에서 록히드마틴이 일본 내 항공기 판매를 위해 일본 고위 정계인사들에게 돈을 건넸다는 얘기가 나왔다. 구체적으로 자금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밝혀졌는데 이중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총리에게 넘어간 돈이 5억엔이었다.

 

당연히 일본이 발칵 뒤집어졌다, 일본 국회에서 조사가 시작됐고 관련자들이 하나 둘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문제는 부역자들이 아닌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였다. 비록 총리에서 물러났지만 자민당 내에서 최대 파벌을 거느리고 있던 초거물 정치인이었다. 

 

일본 국민들의 수사 요구가 빗발쳤고 결국 검찰에 수사 지시가 떨어졌다. 반대로 다나카는 자민당 내 파벌을 동원해 방패막이를 시켰다. 다나카가 물러난 뒤 총리에 오른 미키 다케오는 자민당 내 소수 파벌이었다. 다나카는 파벌들을 합쳐 유리해진 정국 상황을 이용해 총리 해임안을 합의했다. 국민들은 분노했지만 다나카는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쿄지검 특수부가 1976년 7월26일 벼락같이 다나카를 체포했다. 수사 지시를 받은지 6개월 만에 전직 총리를 구속하는, 일본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 전광석화 같이 일어났다. 당시 수사팀은 다나카에게 정보가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체포 전날까지 법무장관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구속을 '정치적 박해'로 규정한 다나카는 1976년 12월에 열린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며 의원직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1983년 10월12일 도쿄 대법원은 다나카에게 외환 관리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했지만 뇌물죄는 적용받지 않았다.

 

다나카의 경우 도쿄지검 특수부의 칼이 물러난 총리를 향했다면 살아있는 현직 총리를 향해 칼을 들이댄 적도 있다. 시작은 일본 정보회사인 리쿠르트사가 계열회사인 리쿠르트 코스모스의 비상장 주식을 공개직전 정관계에 싸게 양도해 문제가 된 사건이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1988년 아사히신문이 처음 보도한 이 사건으로 걸려든 사람은 미야자와 당시 대장상이었다. 이후 취재가 계속되고 파문이 커지자 도쿄지검이 직접 나섰다. 특수부 수사과정에서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아베 신타로 자민당 간사장(지금의 일본 총리다) 등이 연관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거대한 게이트로 비화됐다. 결국 줄 지은 정치 거목들의 스캔들로 노보루가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도쿄지검 특수부는 내각을 붕괴시켰다. 

 

도쿄지검 특수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사례는 총리들을 상대로 시시비비를 물었을 때였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우리 검찰도 11월20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두고 박 대통령을 '피의자'로 규정하면서 청와대를 향해 시시비비를 묻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비슷한 처지니만큼 도쿄지검으로부터 반면교사로 얻을 것도 있을 터다. 국민의 신뢰를 받던 도쿄지검 특수부가 '신뢰의 위기'에 봉착한 것은 '불패신화'가 깨지면서부터다. 그들이 응원을 받는 동안에는 정치인의 수사 결과물로 내놓았던 기소 중 완전 무죄확정판결이 나온 적이 한 차레도 없었다. 록히드 사건 이후의 특수부 기소는 대부분이 항소심에서 유죄가 확정되고 상고가 기각됐다.

 

하지만 2010년 당시 정권 최고 실세였던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이 정치자금을 허위 기재한 사건을 두고 도쿄지검 특수부는 불기소 처분했다. 이 결론을 시작으로 그들의 명성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2010년 타격을 입은 뒤 검찰 상층부가 정치인 비위 관련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다.

 

권력형 비리와 맞서 신뢰를 얻은 도쿄지검 특수부는 반대로 권력형 비리에 제대로 맞서지 못해 신뢰를 잃었다. 우리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맞섬에서 어떤 태도를 견지할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공소장에 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담지 못한 내용도 계속 수사를 해나가겠다는 의지를 이미 검찰은 뱉어 놓은 상황이다.

 

퇴색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10년 정계 최고 실세인 오자와 이치로(小沢 一郎) 민주당 간사장을 불기소 처분하면서부터다. 정치자금 관련 장부를 허위 기재토록 한 사건이었지만 검찰의 불기소에 시민단체들이 자체 재판행사를 하는 등 신화 몰락의 계기가 됐다. 당시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2010년)’란 책이 등장해 “증거가 있으면 기소하던 특수부가 시나리오를 설정해 조작하는 집단으로 변질했다”고 질타하기에 이르렀다. 검찰출입기자 출신이 쓴 이 책에선 검사들의 수사역량이 떨어졌고 외부압력에 대항하는 기개가 옛날만 못하다고 지적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