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속 대선이 부실 대통령 불러온다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7.01.1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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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일각에서 부실검증 및 국민의 알권리 제한 우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한 결론을 조기에 내기 위해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헌재에서 3월 말 경에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게 대다수 헌법전문가들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최근 헌재의 행보를 보면 빠르면 2월 초나 늦어도 2월 말에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헌재는 주 2회로 숨가쁘게 진행하던 변론 일정에 특별기일까지 추가해 1월16일부터는 주3회로 변론기일을 늘렸다. 여기에 박한철 헌재 소장은 증인들이 또 안 나오면 강제구인 하겠다며 신속 심판 의지를 재차 강조했고, 양측 대리인에 앞으로 시간부족을 이유로 늦지 않게 각별히 유의하라고 주의를 줬다. 재판관들도 대리인단의 늑장 행보에 일침을 놓고 있다. 

 

강일원 주심 재판관은 '검찰 수사 기록이 너무 많아 검토가 늦어졌다"는 대통령 측의 주장을 꼬집었고, 박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받은 도움에 대한 답변을 계속 미루는 것을 두고서는 "요청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는데…답답하다"면서 언짢아했다. 1월 말 박 소장의 퇴임을 앞두고 헌재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심리를 진행하는 모양새다. 따라서 이정미 재판관 퇴임에 임박한 3월초쯤 결론이 나올거란 예상을 뒤엎고 박 소장 퇴임 전 결론을 내려는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주 3회 변론으로 진행하면 1월 중 최대 7번의 변론을 열 수 있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분석이다. 이렇게 되면 대선은 빠르면 4월 초에도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헌재를 통과할 경우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르도록 되어 있다.  

 

지지율 1위 주자에게만 유리

헌재의 탄핵심판 속도가 빨라지고 이에 따른 대선 일정도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선 주자들에 대한 부실 검증 우려도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빠른 대선은 현재 1~2위를 다투는 주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검증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유리하지만, 아직 지지율이 낮은 주자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에 너무 짧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 시사저널

 

실제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후보의 경우 조기대선이 불리할 이유가 전혀 없다. 지지율 2위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다른 주자들에 비해 나은 편이지만 빠른 대선이 달갑지 많은 입장이다. 그는 1월16일 이후에 귀국할 것이라는 당초 귀국 날짜를 앞당겨 1월12일 귀국했다. 헌재의 신속한 탄핵심판 진행 등 국내 정치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반 전 총장에게 빠른 대선은 양날의 검이다. 최근 그는 시사저널이 보도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의 23만불 수수 의혹과 아들 우현씨의 SKT 특혜 의혹 등 검증 논란에 휩싸여 있다. 여기에 한일위안부 합의에 대한 찬성발언, 장인 행적 관련 논란 등 검증해야 할 것들이 계속 터져나올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빠른 대선은 검증 시기를 최대한 줄여준다. 하지만 4월 초 대선이 치뤄진다면 자신의 정치적 가치 등을 국민들에게 알릴 기회가 크게 줄어든다. 줄곧 정치행보를 이어 온 문 전 대표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후발주자들 자신의 능력 알릴 기회 줄어

하지만 이제 막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후발주자들의 경우 자신의 경험과 국정철학을 대중에게 알릴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에서 크게 불리하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정치에 뛰어든지 몇 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런 주장에서는 무관하지만, 안희정 충남지사나 이재명 성남시장,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같은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적 조건으로 인해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사실 세 사람은 올해 말 대선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선거를 준비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후반 ‘천재지변’에 준하는 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나오면서 모든 일정이 뒤죽박죽 되어버렸다. 여기에다 헌재 판단이 빨라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세 사람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급하게 선거캠프를 구성하고, 대선 준비에 들어갔다.

 

지지율 2위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 연합뉴스

 

이재명 성남시장의 경우 지지율은 상위권이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후보보다 민주당 내 기반이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기 대선이 그에게 불리한 여건인 것은 분명하다. 현역 의원 몇몇이 그를 돕고 있지만, 4월 대선이 그에게 촉박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안희정 충남지사의 경우 가장 시간이 아쉬운 사람 중 하나다. 안 지사의 경우 현재 지지율이 5% 전후에 머물고 있지만, 친노 핵심 인사들이 대거 그를 돕는 등 분위기를 타고 있다.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의원이나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가 그를 돕고 있다. 여기에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의 경우 최근 문 전 대표 측에서 옮겨왔다. 주변 인사들의 면면만 보면 친노 적통 경쟁에서 전혀 문 전 대표에게 밀리지 않는다. 여기에 물밑조직까지 안 지사를 돕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몇 달의 시간이 더 주어졌을 경우 안 지사의 당선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안 지사의 경쟁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문 전 대표 측은 지지율 2,3위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나 이재명 성남시장보다는 안 지사의 상승세를 더 우려하고 있다. 문 전 대표가 조기 대선을 원하는 이유도 안 지사와 무관치 않다. 최근 기자와 만난 한 문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안 지사가 대통령이 되고, 문 전 대표가 나라의 큰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친노 측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발언이다. 

유승민 의원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유 의원 역시 대권 출마 선언을 했지만 상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에 쫓겨서 준비에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전 의원, 김종인 의원,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 설 전후로 대권 도전 선언을 계획하고 있는 정치인들도 다르지 않은 입장이다. 뿐만 아니라 너무 이른 대선은 현재 거론되는 후보 외에 새로운 후보가 떠오를 틈을 주지 않는다. 창조적 정계개편도 원천적으로 어려워진다.

여유로운 검증이 국민들에게도 유리 

국민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떨까. 현재로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조기 퇴진과 빠른 대선을 원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인물과 정책에 대한 충분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으면 제2의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만난 검찰의 한 간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BBK 사건에만 민주당 측이 꽂혀 있었기 때문에 정작 MB 자체의 능력에 대해서 제대로 된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대선도 마찬가지다. 정치공학적으로 야권 통합 등에만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최순실 의혹 등이 언론을 통해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이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이처럼 이번 대선도 분위기에 휩쓸려 치러질 경우 후보자들에 대한 부실 검증 우려가 높을 수 있다는 것이 정치권 일각에서 불거지는 우려의 목소리다. 1월12일 방송된 JTBC 썰전에서도 출연자인 전원책 변호사가 비슷한 말을 했다. 

“조기 대선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검증이 부실할 수 있거든요. 대선 주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치권이 분위기에 휩쓸려 조기 대선을 주장하기 보다는 헌재의 속도를 늦추자고 제안하고, 충분한 인물검증과 정책 홍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지금 여론에 휘말려 너무 졸속 대선을 치르면 과거의 사례가 또 재현될 수 있다”며 “적어도 8월 이후 대선을 통해 후보자들에 대한 충분한 검증의 시간을 가져야 결과적으로는 국민들에게 유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선 시기를 늦춰야 한다는 것은 박 대통령 측이 헌재심판을 지연시키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유이며 헌재 측에서도 정치권의 이런 우려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도 "너무 빠른 대선은 개헌을 비롯한 중요한 정치 이슈에 대한 주자들간 치열한 토론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며 "유력 대선 주자일수록 이럴 때 여유를 보여주는 것이 본인에게도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헌재가 탄핵심판 결과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정치일정까지 신중하게 고려해 진짜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헤아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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