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 편)] 한국은 해상왕국이었다 (상)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2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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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변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역사, 새로 발굴된 유물이 가리키는 새 역사

유라시아 대륙의 지도를 보자.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부분은 왼쪽에서부터 로마, 그리스, 그리고 한국이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외관으로 볼 때 가장 닮은 모습을 하고 있고, 위도도 비슷하다. 셋 다 대륙에 붙어 있는 반도라는 게 공통된 특징이다.

 

그리스와 로마는 유럽과 미국, 즉 ‘서양’의 원조로서 자랑스럽게 내세워지고 있으며, 특히 바다를 이용해서 넓게 세력을 펼친 해상대국으로 유명하다. 이들이 그런 위용을 떨쳤던 건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서 1500년 전 사이의 일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대륙으로 붙은 쪽에 큰 산이 있어서 배를 만들 나무를 충분히 공급받았기 때문이며 바다에 접해 있어서 육지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국토의 4분의 3이 산지이며, 특히 바다에 접한 남쪽 바로 위는 태백산계와 소백산계가 만나서 풍부한 산지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소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둘러싸여 있는 지중해에 위치한 그리스와 로마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한국도 과거에 위대한 해상국가였을까?

 

 

서양에 그리스와 로마가 있었다면 동양엔 ‘가야’가 있었다

 

“그렇다”고 요즘의 역사는 말한다. ‘요즘’이라고 하는 것은 21세기 들어와서의 얘기다. 국사학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三國)시대’가 아니라, 여기에 가야를 더해 ‘사국(四國)시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관 입구에서 제시되는 한국사 연표에는 삼국뿐 아니라 ‘가야’도 당당하게 한 범주로 취급하고 있다.

 

새롭게 밝혀진 역사에 따르면 가야는 태백산계와 소백산계가 만나 형성하는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고, 주로 낙동강 줄기를 타고 배로 움직여 바다로 진출했던 해상국가였다. 초대 국왕인 수로왕이 왕으로 옹립된 것이 42년이었다. 가야가 신라에게 몰락한 것이 562년이고, 고대 로마는 기원전 27년부터 476년까지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는 훨씬 더 먼저 시작됐지만, 고대 그리스 시기를 3분했을 때 제일 마지막에 해당되며, 훨씬 더 넓은 범위로 해상활동을 했던 헬레니즘 시기는 기원전 200년대에서 서기 600년대까지 존재했으므로, 가락국의 활동 시기는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해상활동 시기와 거의 겹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중해의 두 나라가 위대한 해양국가의 아이콘처럼 숭상되고 있는데 비해, 가야의 현재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는 해상국가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해상국가로서 어느 정도의 위용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학문적으로도 그리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지도를 보고 지형적인 특성을 고려해보면, 한반도의 동남쪽 낙동강 유역에 존재했던 가야라는 나라 외에도 한반도 서남쪽에 살았던 인간집단들도 충분히 해상으로 진출해서 활동했을 법 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물론 여기서 ‘그리 많이’, 혹은 ‘전혀’라는 부정의 부사를 쓴 것은 ‘공식학계’ 얘기다. 그 지역을 실제로 조금만 답사해보면, 아주 오래 전 바다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했음을 전하는 구전자료와 물리적 증거들이 엄청나게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은 아직 ‘공식 역사’에 담겨있지 않을 뿐이다.

 

5세기대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는 토기류 중 하나인 '배모양토기'. 최근 가야는 해상왕국이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유물과 유적들의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 연합뉴스

가야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한국인의 의식 속엔 ‘바다와 관련된 한반도의 역사’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비슷한 지리 및 지형적 특성을 가진 그리스와 로마가 위대한 해상대국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참 이상할 정도로 한반도의 역사에 해양사 얘기가 없었다. 거의 모든 문물이 중국을 통해 육로로 들어온 것처럼 얘기되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내륙에 위치한 편인 고구려, 심지어 발해의 역사가 위대한 조상 모습의 전형인 것처럼 강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옛날에, 인도에서 한 공주가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와서 임금님과 결혼했다.” 

좀 재미있고 특이한 설화 구성처럼 들릴지 몰라도, 이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랬을까?

 

이 문제는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적어도 700년 동안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이 대목이 실려 있는 《가락국기》는 1000년대 초, 지금의 김해지방인 금관주 지사였던 한 문인이 엮은 역사책이라고 하는데,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요약본만 《삼국유사》(1281년) 안에 수록돼 전해진다. 내용 중엔 하늘에서 임금이 내려오고,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며, 사람이 동물로 모습을 바꾸는 등 설화적인 요소가 많아서 인도에서 공주가 왔다는 부분도 당연히 설화일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말이다.

 

 

‘공식 역사’엔 없는 바다 위 역사

 

1977년 아동문학가이자 역사가인 이종기가 《가락국탐사》를 출판하면서 전혀 새로운 시각이 제시됐다. 그는 일반인의 해외여행 가능성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그 시절, 인도와 일본의 현지를 왕복하면서 줄기차게 가락국 행보의 흔적을 찾는 한편 삼국유사는 물론 중국 진수의 역사서인 《삼국지》, 중국 정사 중 하나인 《수서(隋書)》 등에서 관련 기록을 찾는 등 망각돼버린 한반도의 해양 역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인도의 공주가 실제로 가락국의 왕비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은 그가 새롭게 제시한 한반도 해양역사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가락국의 초대 임금인 수로왕이 재위했던 서기 1세기 무렵에는 한반도, 특히 지금의 남한에 해당되는 지역에는 큰 강 및 해안에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무수히 작은 해상국가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수로왕의 가락국은 그 중 세력이 컸던 국가로 그 교역범위가 일본 서북부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충분히 이르렀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들으면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40년 전인 1970년대에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로 간주됐다. 하지만 이종기의 가설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아 이 화두는 역사학에서 지금까지 간간히 목소리를 내오고 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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