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의 시사미식] 비선실세의 등장, ‘매운맛’의 부활
  • 김유진 푸드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25 01:26
  • 호수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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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돈 주고 매운맛의 통증을 사는 이유는? 매운맛 통증이 스트레스와 우울증 감소시켜

시사저널은 이번호부터 ‘김유진의 시사미식(時事美食)’을 새롭게 격주로 연재합니다. 필자 김유진씨는 푸드 칼럼니스트이자 외식업 컨설턴트로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입니다. 베스트셀러 《장사는 전략이다》《한국형 장사의 신》의 저자로도 잘 알려졌습니다. 23년간 음식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한 전직 PD이고, 국내 300개 이상의 브랜드 매니지먼트를 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등 국내 주요 기업과 기관의 F&B 총괄 컨설팅을 담당했습니다.

 

요즘 들어 주말 광화문 골목은 인파로 넘쳐난다. ‘비선실세’ 덕이다. 어스름한 저녁, 필자는 지인의 손에 이끌려 대기 손님이 꽤 많은 한 식당 앞에 줄을 섰다. 낙지볶음 전문점이다. 오래 전 드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자리를 안내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 비선실세들이 입담거리였다. 특검이 얼마나 밝혀낼 수 있을까? 모르쇠로 일관하면 위증죄만 해당할까? 이모와 조카는 끝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뺀질대는 장관은 이번에도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을까? 올해 수험생들이 이대를 피한다던데…. 둘의 수다는 네버엔딩 스토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안경에 김이 서릴 정도로 식당 안은 후끈했다. 지인이 능숙하게 주문을 던진다.

 

“볶음 둘에 조개탕 하나요. 소주도 한 병 주시고요. 참, 콩나물 많이 주세요.” 그때서야 이 집의 메뉴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무교동과 광화문 일대의 낙지집들은 ‘스피드’가 생명이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물수건으로 손 닦고, 컵에 물 따를 시간이면, 이미 낙지 접시가 테이블에 오른다. 눈 깜빡할 사이에 스캔을 마치고 오동통한 녀석을 집어 입으로 옮긴다. 욕심이 과했던 모양이다. 윗입술에 양념이 잔뜩 묻었다. 능숙하게 아랫입술을 움직여 볶음장을 훔친다. 낙지의 속살을 서너 번 깨물자 이내 날카로운 매운맛이 혀를 찌르기 시작한다. 기다렸다는 듯 콧등과 이마에 땀이 맺힌다.

 

여기서 멈추면 한국인이 아니다. 이미 얼얼해진 혀에 뜨거운 조개탕 국물을 붓는다. 식도를 따라 속이 찌르르하다. 국물이 지나는 위치가 정확하게 감지될 정도다. 바늘로 혀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찌푸렸던 이맛살이 느슨해진다. 내일 아침 화장실에서의 따가움이 뻔히 예측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젓가락은 맵디매운 낙지볶음 접시로 향하고 있다.

 

© 뉴스뱅크이미지

70~80년대 군사정권서 매운 음식들 쏟아져

 

그 후로도 몸의 감각기관을 괴롭히는 어리석은 행동들이 이어졌다. 오른손의 젓가락질이 바빠지는 것과 비례해 왼손의 물수건이 축축해진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인의 앞머리는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앞뒤 테이블의 손님들도 뒷목이 반짝반짝 빛난다. 아이러니한 것은 손님들이 웃고 있다는 거다. 일부러 ‘내 돈’ 내고 고통을 사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왜 우리는 돈을 내며 고통을 구매하는 것일까?’ 정답은 지금의 정치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위에서도 줄곧 매운맛이라 언급했지만, 사실 매운맛은 맛이 아니다. 통증이다. 혀에서 느끼는 맛은 단맛·짠맛·쓴맛·신맛·감칠맛이 전부다. 이외에는 향이고, 매운 건 아픔을 느끼게 하는 통각이다. 그럼 왜 비싼 돈 주고 통증을 사는 걸까? 정치적·사회적 혼란은 매운 음식의 유행을 가져온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아주 많은 매운 음식을 만들어냈다. 낙지볶음을 필두로 신당동 떡볶이, 춘천 닭갈비 등이 뒤를 잇는다.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 정권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고추짬뽕·매운갈비찜·매운쫄면… 이게 전부가 아니다. 빙빙 돌아가는 전기구이와 기름에 튀긴 통닭이 주를 이루던 이 시기에 비로소 양념치킨이 등장했다. 전국을 강타한 양념치킨의 인기는 당시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라면까지 화끈하게 매워진다. 바로 신라면의 등장이다. 사나이 울리는 매운맛, 이 녀석이 시장에 깔리며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TV 광고에서도 이 포인트가 소구(訴求)되었다.

 

 

매운맛의 유행, 7~8년 주기를 가지고 있어

 

이전까지의 광고에서는 땀이 등장하면 ‘사형감’이었다. 하지만 농심과 광고대행사는 땀을 훔쳐가며 먹을 정도로 맵다는 포인트를 앞세웠다. 결과는 대성공. 매운맛의 유행은 7~8년 주기를 가지고 있다. 불닭·매운닭발·불주꾸미·캡사이신냉면 등도 이 주기를 피하지 않는다. 매운 통증은 우리의 몸을 바꾼다. 외부로부터의 통증을 막아내기 위해 우리의 몸은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 엔도르핀을 분비한다. ‘내인성 모르핀’이라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통작용을 가지고 있어 통증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 친구는 우리 몸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분비를 억제한다. 그 덕에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감소하게 되는 거다. 어느덧 접시 위의 낙지가 반으로 줄어 있다. 지인도 필자만큼이나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이다. 필자를 보며 씨익 웃더니 슬쩍 물어본다. “비빌까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이 양반이 비빔 대접에다가 상추도 몇 장 부탁을 한다. 지나친 부탁이다 싶었는데 주인장의 대꾸가 가관이다. “비볐으면 싸야지, 그럼.”

 

밥이 담긴 대접은 큼직했다. 남은 양념과 콩나물, 그리고 단무지와 조개탕 국물을 넉넉히 넣고 비볐다. 스테인리스 그릇과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오늘따라 경쾌하다. 보란 듯이 대접을 필자 앞으로 밀어준다. 일부러 큼직한 상추를 한 장 골랐다. 야무지게 쌈을 싸보겠다는 의지가 그리 드러났다. 상추 위에 산더미처럼 밥을 올리고 오므린 뒤 볼이 미어져라 입안으로 구겨 넣었다. 코로 숨을 빼내며 밥과 낙지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큼은 비선실세도 그 떨거지들도 다 잊게 된다. 굳이 낙지가 아니어도 좋다. 매운족발이든 닭발이든 불닭이든 젓가락으로 크게 한 점 들어 쌈을 싸자. 기왕이면 분노와 울분을 함께 싸서 삼켜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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