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 편)] 북으론 낙동강을 따라, 남으론 바다 건너 영토를 넓힌 가야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2 11: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야연맹의 남쪽 경계에 대해서 이종기는 한반도 남부 지명을 거론하던 기존 이론들과는 스케일이 다른 해석을 하나 내놓았다. 일본 규슈지방 후쿠오카 현 가라츠 시 일대라는 것이다. 그는 가락국을 포함한 가야연맹이 일본 열도에 분명히 영토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 근거로 가야연맹이 있었던 지역의 인간집단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인 ‘변진(弁辰))’에 대한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위지>의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변진의 남쪽 끝인) 독로국은 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其瀆盧國與倭接界)”

이 해석은 그의 유고집인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에 나온 것인데, 해상국가로서의 가야연맹에 대한 엄청난 얘기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판도가 바다 건너 일본 열도까지 포괄한다는 것이다. 

 

사실 가야연맹의 영토가 바다 너머에도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첫째는 해상국가 영토의 일반적 존재양상을 볼 때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전 회차에서 페니키아 얘기도 나왔지만, 해상국가의 영토는 바다 너머 동떨어진 땅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다음의 지도를 보자.

 

서기전 550년 경의 지중해 판도


서기전 550년 경, 페니키아가 맹위를 떨칠 무렵 지중해의 판도다. 에트루스카, 다치아, 트라키아, 리디아, 페르시아 등의 국가들은 육지에서 비교적 큰 면적을 점하고 있지만 해상활동을 하기엔 곤란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페니키아, 헬라스(그리스의 옛 이름), 일리리아(로마 해양족의 옛 이름)는 바다를 통해 활동하기 좋은 위치였음도 알 수 있다. 

 

빨간 색으로 표시된 페니키아의 영토, 파란 색으로 표시된 헬라스의 영토, 그리고 녹색으로 표시된 일리리아의 영토를 보자. 바다를 사이에 두었다는 사실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페니키아는 지중해 오른쪽 구석, 지금의 레바논 위치에 있는 본토의 수십 배에 달하는 면적의 영토를 지중해 왼쪽 끝부분까지 구축했다. 본토로부터 3000km 이상 떨어진 곳에도 영토가 있었다.

 

 

3000km 너머까지 통치한 페니키아

 

육지를 중심으로 이동의 속도를 생각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활동범위다. 하지만 배를 타고 물길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게 가능한 것이다. 앞서 가야연맹은 페니키아나 헬라스 못지않게 강력한 해상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생태적·지형적·지리적 조건을 갖추었음을 보았다. 페니키아가 수천 km 떨어진 곳에 영토를 구축했는데, 가야연맹이 수십 km 밖에 안 되는 대한해협 건너에 영토를 두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더 말이 안 될 것 같다.

 

두 번째 근거는 앞서도 나왔듯이 글의 관용적 쓰임새에 의거한 판단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진의) 독로국은 왜와 접계하고 있다(其瀆盧國與倭接界)”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약용도 요즘 대부분의 사학자들도 가락국의 영토는 한반도에 국한돼있다고 봤기 때문에, ‘바다 건너 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나라를 가리켜 ‘접계(接界)’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을까? 한자어 ‘접(接)’은 물리적으로 서로 닿아 있는 모습을 가리킨다. ‘계(界)’는 인간 집단을 폭넓게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두 이질적인 인간집단이 맞대고 존재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술어다. 이런 표현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동떨어져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보다는 육지에서 그야말로 국경을 맞대고 있을 때 쓰이는 게 자연스럽다. 

 

가령 한반도의 위치 조건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 중국과 접계하고 있다’고 표현될 것이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중국과, 남쪽과 동쪽으로는 일본과 접계하고 있다’고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왜접계(與倭接界)’라는 표현을 봐서는 독로국과 왜는 육지에서 경계를 공유했다고 보는 게 가장 직관적인 해석이다. 

 

ⓒ 연합뉴스

왜와 같은 육지에 있었던 가야연맹

 

가야연맹의 일원인 독로국이 일본 열도에서 왜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면 가야연맹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가락국이 일본 열도까지 자기 영토로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독로국 자체가 가락국의 식민지와도 같은 성격의 집단이었을 수 있다. 이런 식의 영토 형성은 해상국가에겐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유럽이나 동남아 등 해양사 기록들이 잘 보전되어 있는 지역에서는 굳이 논증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해양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탁월하게 갖추고 있는 한반도 남부에서 그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단정한다면 그게 더 부자연스럽다. 

 

이종기의 분석대로 가락국의 남쪽 국경이 지금의 가라츠 일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깊이 일본 열도 안으로 들어간 곳에 가락국의 남쪽 국경이 있을 수도 있다. 이번에도 인간의 기본적 행동 패턴과, 아주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합해서 추론해보자.

 

원래 인간은 바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정주집단을 형성하며 산다. 울창한 삼림에서 발원해서 하구에 좋은 충적 평야를 형성하는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야말로 인간이 정주해서 살기에 최적의 입지조건이다. 바로 지금의 김해평야 같은 곳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곳에서 인간집단이 형성되어 인구가 계속 늘게 되면 더 넓게 팽창한다. 육지 쪽으로는 높고 험한 산이 있어 더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거나, 바다 건너 가까운 곳에 육지가 있으면 그곳으로 이동하는 전략을 쓴다.

 

가락국도 이런 식으로 팽창했다. 수로왕이 건국했을 당시에는 6개의 가야가 있었는데,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6세기 초에는 적어도 22개의 가야가 낙동강 수계를 따라 자리 잡은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본다. 낙동강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중간 중간 좋은 지천이 있어서 충적평야가 형성된 곳, 즉 양산, 창원, 밀양, 함안, 의령, 합천, 고령, 구미, 상주, 안동, 영주 등에 파트너 도시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도시국가들은 낙동강 하구 쪽에서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점차 형성되었을 것이다.

 

배를 타고 멀리 인도까지 바다를 누비던 가야인들이 좁은 강줄기만 따라 올라가며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을까? 당연히 바다 쪽으로도 나갔을 것이다. 낙동강 포구에서 50k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쓰시마까지는 기후조건이 좋으면 한 시간도 채 안 걸렸을 가능성도 있다. 북서풍이 많이 불 뿐 아니라 이 지역 해류가 대체로 한반도에서 일본열도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쓰시마를  영토로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테지만 이곳은 작은 섬이어서 인구수용 한계가 뻔하다. 가야인들은 곧 이곳을 중계기지로 일본 열도, 특히 바닷길로 가기 쉬운 규슈로 진출했을 것이다. 

 

일본 열도에서 가락국은 우선 큰 하천이 바다 근처에서 충적 평야를 형성하는 곳을 찾았을 것이다. 또 강을 따라 올라가서 중간 중간 역시 좋은 충적 평야가 형성된 곳을 찾아 영토로 했을 것이다. 가야연맹을 확장하던 때처럼. 그리고 고대에 전 세계의 해양족들이 항상 그렇게 했던 것처럼. 앞에 나온 지중해 지도를 보면 헬라스(그리스)는 심지어 나일강을 따라 이집트 깊숙한 곳에 영토를 둔 적도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가락국의 해외 영토는 의외로 일본 규슈 지방에 꽤 폭넓게 존재했을 수도 있다. 이건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그 오랜 세월에도, 그 많은 노력에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흔적들에 합리적 추론을 보태면, 명료하게 떠오르는 결론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