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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 편)] 가야 남쪽 경계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

규슈의 ‘한국악(韓国岳)’ 이름을 가진 산의 유래 주목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9(Wed) 16: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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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문화적 유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확 바꾸어놓은 역작이다. 저자 유홍준은 7권에 걸친 국내편을 낸 뒤 2013년 해외편 시리즈 첫 번째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1권 규슈》를 내놓았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엔, 특히 규슈에는 오랜 세월 지우려는 노력이 있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로부터의 영향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유홍준은 매의 눈으로 그런 걸 간파하고, 우리와 일본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풍부하고도 정확한 지식으로 그 의미를 통찰한다. 그 중 하나, ‘한국악(韓国岳)’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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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한자로 ‘한국악’이라고 쓴 이 팻말은 규슈의 남단인 가고시마현 기리시마 인근 연산지대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가라쿠니다케’에 있다. ‘가라’는 ‘가락국’ 혹은 더 폭넓게 ‘가야’를 지칭하는 일본어다. ‘쿠니’는 ‘국가’라는 뜻, 다케는 험난한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가라쿠니다케’라고 불려온 이 산은 정확히 ‘가락국산’이라는 뜻의 이름을 갖는 것이다. 

 

지도를 얼핏 보아서는 가라쿠니다케는 규슈 지방에서도 남쪽 깊숙이 들어가 있다. 쓰시마 건너 바로 코앞인 규슈 북부 해안지대와 가야의 연관성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지금 상황이다. 이렇게 규슈 남부 깊숙이 오지에 자리 잡고 있는 산에 도대체 왜 ‘가락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유흥준은 이 산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몇 가지 버전이 있다고 한다. 그 중 현지인들이 주로 얘기하는 것은, 가야에서 도래한, 즉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이 산에 올라가서 고향을 그리워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일반적인 정서를 생각하면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는 설명이다.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살게 된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고향 쪽을 향한 산이나 해안가의 높은 곳, 혹은 고향과 비슷한 느낌의 지형에 그런 이름을 붙였던 예는 세계 어디서나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한국악’

 

하지만 실제로 이곳에 가보면, 그런 설명에 공감하기 힘들 것이다. 가라쿠니다케 일대는 쉽게 오르기 힘든 바위투성이의 험난한 화산이다. 표준 고도 1700 미터, 설악산 대청봉 정도의 높이의 이 산 정상은 일대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화산 분화구다. 요즘이야 한국에서 가라쿠니다케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돌아 고원도시 기리시마 시까지 가서 자동차로 거의 정상 부근까지 올라간다. 그 옛날 가야 쪽에서 가려면 북쪽 길로 에비노 고원 입구에서 가라쿠니다케까지 약 5km에 달하는 좁고 험한 길을 올라가야 했다.

 

1500~2000년 전 이 인근에 가야에서 도래한 사람들이 살았다면 큰 배를 타고 움직이기 쉽도록 바다나 큰 하천 근처에 살았을 것이다. 좁고 경사가 급한 개울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물론 높고 험한 산을 타는 것은 더더욱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하필이면 아무런 의미도, 관련성도 없는 깊숙한 오지의 험산 꼭대기에 가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거기에 ‘가락국산’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그곳에 올라가면 가야가 한 눈에 보였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라쿠니다케 정상에 올라서 가야 쪽을 본다면, 멀기도 멀거니와, 그 사이에 위치한 높은 구마모토 산지의 봉우리들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가라쿠니다케의 외관이 고향을 연상시켰을 리도 없다. 이곳은 한반도에는 없는 검은 현무암 투성이 화산지형이다. 

 

그렇다면 왜 이 산에는 ‘가락국산’이라는 이름이 붙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까? 이 수수께끼를 간단하게, 그리고 충분히 납득이 가게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첫째, 규슈의 지형을 거시적으로 파악할 것. 둘째, 고대 해양족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영토를 구축하는 방법을 이해할 것. 

 

 

위 지도에서 보다시피 규슈는 마치 가야를 향해 열려 있는 것 같은 지형을 갖고 있다. 즉 섬 중앙에서 약간 동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산지가 몰려 있어서, 가야가 있는 서북쪽으로는 큰 강과 그 일대의 비옥한 평야들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가라츠, 나가사키, 구마모토 등 규슈의 중심지들은 하나같이, 배를 타고 가락국에서 출발한다면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평야에 자리 잡은 거주지들이다. 오른쪽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가야가 쓰시마를 영토 혹은 파트너로 삼았다면 거기서 출발해서 가라츠, 나가사키, 구마모토까지 확장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라츠는 마츠우라 강, 나가사키는 혼묘 강, 구마모토는 구마 강 하류의 중심지이므로, 이들을 영토로 했다면 여기서 이 강들을 타고 이어지는 중상류의 평야 일대까지 장악하는 것 역시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화산지형으로 산세가 급하므로, 어디든 산이 막혀 있는 곳을 가야인들이 점령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가락국이 해상국가로서 규슈에 진출해서 영토를 만들었다면, 아무리 좁게 잡아도 왼쪽 지도 빗금 친 부분 정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규슈 에비노 고원에서 발견된 가야의 흔적

 

마츠우라 강에서 구마 강까지 하천 유역은 장악하기 쉬워도 그 밑의 센다이 강은 좀 어려웠을 수 있다. 강의 중하류 쪽 양안이 협곡을 이루고 있어서, 원주민의 협공을 받는다면 통과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도 험산이어서 그리 많은 원주민이 살지는 않았을 터이므로, 어찌어찌 중상류에 형성된 에비노 평야까지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비노 평야의 상류에는 에비노 고원에 이어 가라쿠니다케가 있다. 아마 바닷사람 가야인의 행보는 에비노 고원을 앞에 두고 주춤했을 것이다.

 

그보다 남쪽으로는 가라쿠니다케가 포함된 기리시마 연산지대가 가로막고 있다. 가야인에게 익숙한 바닷길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남쪽부분의 가고시마만은 특이하게 바다가 깊숙이 육지 안으로 함입된 지형이다. 또한 그 주변은 비교적 비옥한 평야지대여서 많은 원주민들이 살았을 것이다. 외부에서 누군가가 배를 타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이런 지형이면 철통방어가 가능하다. 따라서 가야의 영토 경계는 센다이강 하구에서 에비노 정도에서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 원주민이 살던 땅에, 한반도 남부에서 온, 그들보다 파워가 컸던 해양족들이 밀고 들어오자, 원주민은 고산지대, 협곡 등 보다 방어하기 유리한 지역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을 것이다. 원래는 동남아시아 계열이었던 대만 원주민들이 중국 본토로부터 한족들이 들어오자 그들에게 밀려서 높고 험한 산 속에 사는 고산족(高山族)이 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은 해양국의 식민지가 된 지역에서는 비일비재 일어났었다. 그럴 경우 대개 해양족이 넘기 어려운 높고 험한 산이 경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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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본다면 《삼국유사》에서 사라진 가락국의 남쪽 경계의 이름은 ‘에비노’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보면 여러 가지가 설명이 된다. 에비노 평야지대에 충적물을 공급하는 에비노 고원은 가라쿠니다케의 정상으로부터 불과 2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으며, 사실상 가라쿠니다케의 중턱 기슭에 해당된다. 제법 큰 강으로 이어지는 에비노 평야까지는 가락국 사람들이 들어올 만했지만 에비노 고원에서 가라쿠니다케에 이르는 육지의 험로를 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라쿠니다케는 이 두 집단 사이의 경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여왜접계(與倭接界),” 즉 “왜와 더불어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표현이 말이 된다. 왜의 입장에서 자신들과 가락국 영토 사이에 놓인 산을 ‘가락국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가락국이 동시대의 다른 해양국가들처럼 바다 건너에도 본토 못지않게 너른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자연스럽다. 그리고 만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가락국 남쪽 경계로서 ‘에비노’, 혹은 일본 열도 깊숙한 곳의 다른 지명이 쓰여 있었다면, 후대 일본의 역사가들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걸 부인하고 증거를 없애려고 노력했으리라는 것도 인지상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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