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 피천득
  • 조철 문화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5.10 12:56
  • 호수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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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시인·수필가’ 피천득, 타계 10주기 맞아 《피천득 평전》 출간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 신록을 바라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 선생이 쓴 수필 ‘오월’의 일부분이다. 1910년 5월에 태어나 2007년 5월에 타계해 ‘5월의 시인이자 수필가’로도 불리는 그는 근·현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한국문학사에서 서정문학의 획을 그은 작가로 기억된다.

 

타계 10주년을 맞아 피천득의 삶과 문학을 따르고 싶어 하는 제자 정정호 중앙대 영문과 명예교수가 《피천득 평전》을 출간했다. 정 교수는 독자들이 피천득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구성과 전략을 달리했다. 피천득이 생전에 칭찬했던 새뮤얼 존슨의 《영국시인전》 구성을 따르되, 순서를 바꿔 1부 생애, 2부 문학, 3부 사상 순으로 구성했다. 평전 전통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 평전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미있는 비평서로 읽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정정호 지음 시와진실 펴냄 408쪽 2만9000원


피천득 선생은 구십 평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테지만, 그의 작품은 시와 수필이 각각 100편 안팎이다. 살다간 세월과 명성에 비해 적은 편이다. 내용도 짧고 단순해서 많은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쉽게 읽힌다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피천득은 유독 어린이를 노래한 시와 단편소설을 번역하는 데 힘썼다. 피천득 문학의 원형을 가히 ‘어린이 되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관점으로 진실하게 묘사하려고 했던 그에게, 어린이는 삶의 지표며 문학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정정호 교수는 책의 부제(副題)로 ‘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을 올렸다.

 

순수한 동심을 간직한 채 평생 추구한 ‘어린이 되기’는 피천득 문학의 영혼이자 중추였다. 아호(雅號) 또한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금아(琴兒)라 지었다. 단순한 형식의 시에는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시선을 담았다. 이런 문학적 원형은 그가 선택했다기보다는 주어졌다고 보는 편이 맞다. 피천득이 7살에 아버지를, 10살에 어머니를 잃고 어른으로 성장을 멈췄다고 말하는 정 교수는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은 피천득에게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슬픔과 더불어 그의 문학에서 숙명적인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설명한다.

 

 

유독 어린이를 노래한 시와 단편소설 번역에 힘써

 

이야기는 피천득의 경성제일고보 시절로 이어진다. 부인을 통해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을 들은 이광수는 피천득을 자신의 집에서 3년간 머무르게 하며 영어와 영시를 가르쳤다. 스승이자 보호자가 된 이광수 역시 11살에 부모를 여읜 고아였다. 피천득은 1926년 이광수의 권유로 중국 상하이(上海)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이 아닌 상하이를 유학지로 택한 배경엔 당시 임시정부 요원으로 있던 안창호가 있었다. 피천득은 흥사단 단우가 돼 매주 두 번씩 안창호의 가르침을 받았다. 피천득은 훗날 안창호의 가르침 가운데 ‘절대적인 정직’을 으뜸으로 꼽으며 자기 문학의 뿌리이자 근본정신이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피천득에게 이광수와 안창호가 인생의 영원한 스승이었다면, 그가 사랑한 시인 도연명·황진이·셰익스피어는 문학과 정신세계의 틀을 지었다. 서울 한복판 청진동에서 태어난 피천득이 평생 시끄럽고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고자 한 데는 전원시인 도연명의 영향이 컸다. 정 교수는 도연명과 비슷한 피천득의 심정을 담은 시 ‘어떤 오후’를 인용한다.

 

‘오래 쌓인 헌 신문지를 / 빈 맥주병들과 같이 팔아 버리다 // 주먹 같은 활자로 가로지른 기사도 / 5단 내리뽑은 사건도- // 나는 지금 뜰에서 / 꽃이 피는 것을 바라다보고 있다’

정 교수는 “피천득은 도연명이나 퇴계처럼 단호하게 전원으로 귀거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은둔거사로 지내며 술도 못 마시고 담백하고 청빈하게 살았던 진정한 전원시인이었다”고 설명한다.

 

2002년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응원하는 고 피천득 선생 © 시와진실 제공

 

“피천득의 삶은 어린이 같았고 사상은 나무 같았다”

 

“피천득의 삶은 어린이 같았고 사상은 나무 같았다”고 말하는 정정호 교수는 평전을 정리하며 프롤로그 ‘어린이 되기’로 시작해 에필로그 ‘나무 되기’로 끝나도록 했다. 결국 어린의의 동심이라는 세계와 나무로 표현되는 자연의 세계는 하나라는 것이다. 정 교수는 피천득 문학에서 중요한 이미지인 ‘나무’는 땅(지상)과 하늘(해와 별)을 이어주는 상상력의 사다리라고 설명한다. ‘나무 되기’란 희망이 사라진 듯 보이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무의 감수성으로 웃으며 우주와 조응(照應)하게 하고, 작은 바람에도 몸을 흔들면서 즐겁게 춤추게 하는 ‘축복의 무지개’라는 것이다. 말없는 나무의 사랑을 실천하며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려 했던 피 선생의 철학을 엿볼 수 있고, 도덕적 감성으로 ‘사랑’을 실천하려 했던 ‘피천득주의(主義)’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정 교수는 “어린이 같은 나무 되기, 나무 같은 어린이 되기는 영원히 늙지 않는 5월의 소년 피천득이 꿈꾸던 세상이다. 우리 모두 어린이가 되자. 우리 모두 나무가 되자”면서, 피천득의 산문시 ‘어린 벗에게’에서 어린이와 나무의 아름다운 관계가 잘 나타난다고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해 설명한다.

 

‘가을도 지나고 어떤 춥고 어두운 밤 사막에는 모진 바람이 일어, 이 어린 나무를 때리며 꺾으며 모래를 몰아다 뿌리며 몹시나 포악을 칠 때가 옵니다. 나의 어린 벗이여, 그 나무가 죽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때 이상하게도 그 나무에는 가지마다 부러진 가지에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꽃이 송이송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이 꽃빛은 별 하나 없는 어두운 사막을 밝히고 그 향기가 멀리멀리 땅 위로 퍼져갑니다.’

정 교수는 이 시에 이어 ‘축복’이라는 시를 인용해 나무의 희망이 무엇인지 부연 설명한다.

 

‘나무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은 /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 나무가 되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New Book

 

다시, 국가를 생각하다  

토드 부크홀츠 지음│21세기북스 펴냄│488쪽│2만2000원

 


오늘날 부유한 나라들이 직면한 경제적·정치적·문화적 분열 양상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위기를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자 혁신의 기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경제적 번영 이후 국가가 쇠락하는 다섯 가지의 잠재적이고 역설적인 요인을 정의한다. 그 다섯 가지는 바로 출산율 저하, 국제 교역의 확대, 부채 상승, 근로 윤리 약화, 애국심의 소멸이다.

 

 

사람의 부엌: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 

류지현 지음│낮은산 펴냄│380쪽│1만9000원

 

 


시간적으로 보면 인류에게 더 익숙할 법한 냉장고 없는 삶,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음식 저장 문화에 주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냉장고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냉장고가 아닌 자연의 힘을 이용해 음식을 저장하는 삶과 문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하기 위해 3년여 동안 세계 곳곳의 부엌과 텃밭, 크고 작은 농장과 공동체를 찾아다녔다. 

 

 

헬조선 인 앤 아웃 

조문영 등 지음│눌민 펴냄│284쪽│1만6500원

 

 


한국 청년 세대의 글로벌 이동에 관한 인류학 보고서. 생존이 화두가 된 시대에 대한민국 청년들은 한국과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한국 사회는 그들의 고투에 어떻게 화답할 것인가? 젊은 인류학자들이 생생한 현장 연구를 통해 그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두려운 미래에 맞서 더 큰 공동체를 상상하자고 주장한다. 

 

 

박이문 인문 에세이 특별판 세트

박이문 지음│미다스북스 펴냄│전5권│4만4000원

 

 


지난 3월 타계한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미발표 산문과 추도사 등을 보탠 산문집. 1권 《박이문 지적 자서전》, 2권 《박이문 인문학 읽기》, 3권 《박이문 철학 에세이》, 4권 《박이문 인문 에세이》, 5권 《박이문의 서재》로 이루어진 ‘에세이 특별판’을 통해 한국 인문학의 거장이자 뛰어난 에세이스트가 빚어내는 지성과 감성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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