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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힌 판사는 있지만 블랙리스트는 없다?

판사 블랙리스트 ‘셀프조사’ 논란 점점 높아지는 ‘사법부 개혁’ 목소리

이민우 기자 ㅣ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7.05.12(Fri) 13:00:00 | 14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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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안팎을 뒤흔든 사법부 블랙리스트 논란을 놓고 진상조사를 벌인 결과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대법원이 일선 판사들의 성향을 분석해 명단을 관리했다는 의혹에 대한 자체조사 결과였다. 스모킹 건으로 여겨졌던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 등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나온 반쪽짜리 결과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블랙리스트는 없지만 찍힌 판사들은 있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도출한 셈이다.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진상조사는 오히려 대법원 사법개혁 요구에 불을 붙였다. 서울동부지방법원 소속 판사들은 4월26일 양승태 대법원장의 입장 표명과 전국법관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소속 판사들도 5월15일 단독판사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전국 18개 지방법원 가운데 10곳에서 이번 사태와 관련된 판사회의가 열렸거나 열릴 예정이다. 최근에는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시민단체까지 논란에 가세했다.

 

화살은 양 대법원장을 향하고 있다. 의혹이 제기된 이후 법원 안팎에서는 양 대법원장이 블랙리스트 작성을 인지했거나 운용에 관여했는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하지만 양 대법원장은 논란이 제기된 이후 단 한 번의 언급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오는 9월 퇴임을 앞둔 양 대법원장으로선 최대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

 

© 시사저널 박은숙·연합뉴스


스모킹 건 조사 포기한 ‘셀프조사’

 

논란의 시작은 2015년 8월이었다. 법원 내 최대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산하 소모임에서 법원행정처가 강력히 추진하던 상고법원 도입에 대한 찬반 토론을 벌였다. 대법관이 직접 심리하지 않는 상고심 사건을 맡을 법원을 별도로 설립하자는 주장에 대해 참석자 18명이 반대하고 1명이 찬성했다는 내용을 법원 내부 전산망인 ‘코트넷’에 게시했다. 법원행정처는 해당 주제들이 과거 진보 성향 판사 모임 ‘우리법연구회’와 비슷하다며 이들을 주시했다. 윤리감사관실에서는 해당 활동이 법관윤리강령 등에 어긋나는지를 검토하기도 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이규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2년 임기 내내 “해당 활동은 오해와 부작용 소지가 있다”며 자제를 요청했다. 학술대회 개최 소식을 접한 뒤에는 올해 1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주재한 실장회의에서 두 차례에 걸쳐 △학술대회 취소 △내부행사로 축소 △국제인권법연구회 조치 등을 담은 대응방안이 보고됐다. 특히 국제인권법연구회가 3월초 전국 법관을 상대로 사법 독립과 법관 인사제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대법원 간부가 연구회와 관련해 행사 연기와 축소 등 부당한 지시를 내린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대한 진상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 큰 의혹이 제기됐다. 복수의 판사들로부터 판사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한 일종의 파일을 관리했고, 이 파일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다는 내용이었다. 임종헌 전 차장은 “대법원의 정책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 양승태 대법원장의 개입 가능성까지 언급됐다. 특히 “행정처가 관리하는 판사 동향 리스트를 관리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은 한 판사는 “법원이 판사의 뒷조사를 하는 것을 알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당 판사가 사표를 내겠다고 하자 관련 파일을 삭제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26일간 조사를 진행한 진상조사위는 4월18일 코트넷에 57쪽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게시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선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판사들 동향 파악 파일이 따로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진상조사위는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부당한 압력을 가하고 따르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예고한 내용 등만 인정했다. 행정권 남용은 있었지만 인사권 남용은 아니라는 애매모호한 결론이었다.

 

결과가 발표되자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블랙리스트 파일이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획조정실 컴퓨터나 이메일 서버에 대한 조사를 못했기 때문이다. 진상조사위는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기획제1심의관 등이 사용하던 업무용 컴퓨터와 이메일 서버에 대한 조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법원행정처장이 이 요청을 수용하지 않아 조사를 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법원행정처에서 생산된 문서의 관리 처분 권한이 작성자 개인에게 있다는 주장이었다.

 

‘셀프조사’는 애초부터 의혹 해소가 불가능했다는 의견까지 제기됐다. 진상조사위가 양 대법원장이 지목한 인사들로 꾸려졌기 때문에 제대로 의혹을 조사할 수 없었다는 의견이었다.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활동 관련 사찰 및 외압 지시에 대법원장이 연루되었는지 여부도 조사되지 않았다. 양 대법원장을 상대로 실시한 서면조사 내용도 공개하지 않았다.

 

참여연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5월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법부 블랙리스트 전면 재조사 등을 요구했다. © 연합뉴스


“제왕적 대법원장 구조 바꿔야”

 

법원 내부에선 강하게 불만을 토론하고 있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법원행정처가 자료 제출을 거부했는데 조사위가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은 경솔하다”며 “이 부분은 확실히 따져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수도권 지방법원의 부장판사는 이번 일을 두고 “박근혜 정부와 똑같다”며 “(존재를 인정한) 대책 문건이라는 것 자체가 연구회 소속 판사 등을 계속 사찰했다는 블랙리스트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참여연대와 민변은 “현재 대법원이 자체적인 자정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고 있다”며 “대법원이 외부의 인사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관련 사안에 대해 재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대한 직접 조사를 통해 법관들의 뒷조사 문건의 존재 여부를 밝혀내고, 파일 삭제 등 증거인멸 시도가 있었는지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사법부 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됐다. 문제의 핵심에 섰던 법원행정처가 법원 내 권력기관화하는 경향을 차단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장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 핵심이지만 우선 법원행정처의 권한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며 “법관들의 업무지원을 위한 보조적 역할에 그치도록 개혁하고 민간이 참여하는 별도 사법위원회를 구성해 인사 기준 등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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