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엔 ‘가격파괴’ 결론은 ‘가성비’
  • 김유진 푸드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5.25 14:25
  • 호수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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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의 시사미식] 음식값, 싼 것만으론 부족…맛과 양이 보장돼야 입소문

 

불경기다. 국민들은 이 단어를 입에 달고 산 지 오래다. 호경기는 체감하기 어려운 데 비해, 불경기는 뼈에 사무칠 정도로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뉴스라이브러리 검색을 해 보니 1940년대 몇 해를 제외하고 불경기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은 해가 없다. 경제학자가 아닌 관계로 완벽한 분석은 불가능하나, 생계형 평론가 입장에서 보는 불경기는 이렇다. 대한민국 땅에 돈이 돌지 않는다. 물가는 오르는데 상대적으로 소득이 줄기 때문이다. 그러니 돈을 쓰기 불안하다. 너나 할 것 없이 지갑을 닫아대는 통에 혈관이 막히고 있다. 덕분에 자주 등장하는 유행어가 있다. ‘가성비’, 그리고 ‘가격파괴’.

 

시장에 침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가격적 차별화다. 인간의 뇌는 엄청난 구두쇠다. 구매 본능을 감시하고 억제하는 통제수단을 DNA 속에 심어 놓았다. 부러움을 사는 CEO들 대부분은 고객의 뇌로 침투해 구매 충동 억제의 빗장을 푸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안 먹고 싶은 사람을 먹게 만들고, 신상(新商)을 구입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시크릿 코드’를 알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객이 지불하는 가치보다 돌려받는 재화나 서비스가 ‘더 가치 있어 보이게’ 포장하는 재주도 있다. 여러 가지 노하우가 있겠으나 최고는 역시 가격이다. 고객들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통상적 가격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쥬시·빽다방 등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한반도를 온통 붉은색과 하얀색 로고로 뒤덮고 있는 유니클로, 옷을 입는 것만으로 스페인 패셔니스타가 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자라 등등. 불경기가 최고조로 심화되기 시작한 2012년 이래 가격파괴의 유행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 일러스트 정찬동

괴물을 만난 건 홍대입구였다. 외식업계의 얼리어답터들이 모여든다는 홍대입구 상권에 괴물이 출연했다는 소식은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한걸음에 달려가 메뉴판을 펼쳤다. 가장 윗줄을 점령하고 있는 녀석은 세트메뉴였다. 중화요리 3가지를 기본으로 짜장면 혹은 짬뽕을 고를 수 있는데, 1만원이 넘지 않는다. 이윽고 발견한 ‘괴물짜장면’. 세숫대야만 한 접시에 5인분의 짜장면을 담아준다. 가격은 1만5000원. 1인분만 주문하면 5000원인데, 이것을 주문하면 40% 이득이다. 덜 내고 더 챙기니 고객이 몰릴 수밖에. 여기에 한 가지 재미난 장치가 더 준비돼 있다. 혼자서 12분 안에 이 괴물을 다 해치우면 공짜다. 사대문 안에 짜장면 좀 한다는 젊은 청춘들의 줄이 끊이지 않는다.

 

괴물은 하나가 더 있었다. 짜장면과 어깨를 견줄 만큼 인기가 있다는 ‘괴물탕수육’. 이번에는 세숫대야만 한 크기의 접시가 아니라 세숫대야에 넣어도 될 만큼의 양을 주는데, 2만원이 넘지 않는다. 가운데 큼직한 소스 통이 있고 그 주위를 튀긴 고기들이 에워싸고 있다. ‘부먹’을 하든 ‘찍먹’을 하든 손님의 몫이다. 먹성 좋은 청춘들도 둘이 먹기엔 버거울 양이다. 가격과 양을 동시에 잡아보려는 치밀한 설계도가 돋보이는 식당이다.

 

 

5인분 양의 괴물짜장면, 2900원짜리 회덮밥

 

그러고 보니 또 한 집이 떠오른다. 의정부에 있는 해산물 전문점은 회덮밥이 2900원이다. 찾아가는 내내 필자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대체 어떻게 2900원이라는 가격이 가능한 것일까? 역에서 내려 택시로 이동하는 시간에도 셈은 계속됐다. 가게에 도착해서 수족관을 보는 순간 고개가 끄덕여졌다. 메뉴판을 훑었다. 회덮밥 말고도 충격적인 녀석이 둘 더 있었다. 멍게비빔밥 3900원. 탄성이 나온다. 웬만해선 1만원 밑으로 맛볼 수 없는 메뉴가 멍게비빔밥 아닌가. 괴물짜장면 같은 재미는 찾아볼 수 없지만 전국 어디를 가도 이 가격에 먹는 건 불가능하다.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어진 상태라 앞뒤 테이블을 슬쩍 훔쳐봤다. 여기서 하나의 힌트를 얻었다. 사람 수대로 주문한 테이블은 아예 없었다. 오호라~ 미안한 가격이다 보니 추가 주문이 이루어진 모양이군. 지불하는 대가가 적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추가 수요가 발생한 것이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순간 문제의 그 회덮밥이 눈앞에 도착했다. 어라! 2900원짜리 주제에 사기 그릇? 안경을 벗고 그릇을 관찰했다. 옥스퍼드대학의 감각교차연구소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자면, 무거운 식기나 커트러리는 무려 18%나 더 음식값을 지불할 의사를 만든다고 했다. 고객 입장에서는 같은 라면도 일반 멜라민 대접이 아니라 사기 대접에 내주면 그만큼의 가치를 더 인정한다는 연구 결과다. 1만원을 호가하는 회덮밥도 대부분 가벼운 식기에 담기기 마련인데, 2900원밖에 안 하는 녀석이 감히 이런 고급스러운 그릇을 써? 찬이 담긴 종지도, 미역국이 담긴 공기도 모두 묵직하고 럭셔리함 그 자체다.

 

이외에도 회덮밥의 퀄리티는 세 가지로 판단할 수 있다. 회의 부위와 상태, 채소의 싱싱함, 그리고 밥. 자칫 간과하기 쉬운 친구가 밥이다. 질면 재료가 섞이지 않고, 설익으면 겉돌기 쉽다. 하나하나 재료들을 들춰보는데 실력이 만만치 않다. 처음부터 초고추장을 넣어 마구 비비는 이들이 많은데, 오늘 힌트를 하나 드리자면, 회덮밥은 오히려 간장과 잘 어울린다. 그것도 고추냉이를 푼 간장과 기가 막힌 궁합을 만들어낸다. 골고루 채소 위에 두른 뒤 살살 비벼본다. 좋다. 음식은 눈과 코로도 먹지만 손으로도 먹는다.손에서 느껴지는 촉각이 살면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욕심껏 크게 한 숟가락 들어올려 입으로 옮긴다. 간장의 향이 입을 가득 메운다. 아삭하게 씹히는 채소들의 조합이 좋다. 밥과 함께 씹히는 회도 차지고 탱탱하다. 그 후로 대여섯 숟가락을 연거푸 입에 넣는데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대접을 다 비울 때까지 2900원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아까부터 기다리게 만든 멍게비빔밥에게 미안해 미역국 국물을 두어 숟가락 끼얹어주었다. 멍게비빔밥을 워낙 좋아해 좀 한다는 집들은 거의 다 맛을 보았다. 통영, 여수는 물론이고, 서해와 동해에서도 멍게비빔밥 투어를 한 일이 있다. 비비는 내내 멍게 향이 코를 찌른다. 싱싱하다. 맛이 간 멍게는 떫은 향이 오르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오로지 단내와 고소한 향을 뿜어댄다. 멍게젓갈에 코팅된 밥알이 경쾌하게 혀 위를 굴러다닌다. 

수준급 멍게비빔밥을 3900원에 맛볼 수 있다니 이게 웬 횡재냐 싶다. 나도 모르게 주방 쪽을 바라보며 외치고 말았다. “이모님~ 회덮밥 두 개랑 멍게비빔밥 두 개 포장해 주세요~” 이날 필자는 혼자서 2만400원을 계산하고 나왔다. 오랜만에 두 손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아하! 가격파괴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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