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에도 격이 있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5.26 09:04
  • 호수 14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야한 영화’의 부활, 일본 닛카쓰의 ‘로망 포르노 리부트’

 

1912년 문을 연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 약칭 닛카쓰(日活)는 굴지의 제작사다. 닛카쓰는 ‘태양족 영화’로 불리던 청춘 영화, 리얼리즘 영화와 문학성이 두드러지는 현대극, 전후 액션 영화에 이르기까지 당대 일본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장르 영화를 만들어냈다. 유명 감독인 스즈키 세이준, 미조구치 겐지, 이마무라 쇼헤이 등이 닛카쓰에서 활동하며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이끈 이들이다.

 

닛카쓰가 생산한 영화들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망 포르노’ 시리즈다. 1970년대 초기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저예산 고효율’을 목표로 제작된 이 프로젝트는 경영난을 벗어나기 위한 회사의 궁여지책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효자상품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이야기가 있는 포르노를 뜻하는 프랑스어 ‘로망 포르노그라피크(Roman Pornographique)’에서 따온 이름에서도 연상할 수 있듯, 일반적인 포르노와는 그 결이 다르다. 뛰어난 미장센과 실험적 연출로 무장한 색다른 영화들이 로망 포르노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수십 년 만에 이 프로젝트는 ‘로망 포르노 리부트’라는 이름으로 부활을 선언한 참이다.

 

영화 《바람에 젖은 여자》와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왼쪽부터) © 홀리가든

 

로망 포르노, 신인 감독의 등용문이 되다

 

1970년대 TV의 등장은 일본 영화 산업의 판도를 뒤바꿔 놓았다. 제작사들은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에로티시즘 영화로 눈을 돌렸고, 로망 포르노로 대변되는 일본의 하위 장르 영화들은 이때 탄생한 결과물이다. 1960년대에만 50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하며 승승장구하던 닛카쓰는 1970년대 재정 위기가 찾아오자, 당시 소규모 스튜디오들이 제작하던 에로티시즘 영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닛카쓰의 경쟁사였던 도호·다이에이 등 영화사들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각 회사만의 저예산 에로티시즘 영화 레이블을 만들었다. 이 중 관객과 평단의 반응, 그리고 완성도에서 월등히 앞서는 것이 닛카쓰의 로망 포르노다.

 

닛카쓰의 로망 포르노 제작방식은 무명 배우들을 섭외해 별도의 세트 제작 없이 2~3일 만에 촬영하던 핑크 무비와는 달랐다. 충분한 제작비를 들였고, 스태프 역시 자사 스튜디오의 숙련된 인재들로 꾸렸다. 10분에 한 번꼴로 정사신이 등장할 것, 촬영 기간은 10일 이내, 전체 상영 시간은 60분 남짓이라는 기본 규칙만 지키면 감독이 어떠한 연출적 비전과 스토리를 선보이더라도 무방했다. 바꿔 말하면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는 셈이었다.

 

영화 《암고양이들》 © 홀리가든

이는 불황 속에서도 영화를 만드는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이들에게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 결과 탐미적이고 혁신적인 연출을 선보이는 작품도 여럿 등장했다. 특히 신인 감독들이 경력을 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실락원》(1997)을 만든 모리타 요시미쓰, 《도쿄 소나타》(2008) 등으로 유명한 구로사와 기요시 등도 로망 포르노를 통해 데뷔했다. 1971년 《단지처, 오후의 정사》를 시작으로 닛카쓰가 1988년까지 제작한 로망 포르노는 총 1000편이 넘는다. 《감각의 제국》의 소재인 아베 사다의 실화를 그린 《실록 아베 사다》(1975), 마약상 주인공과 상류층 여성들의 이야기인 《롯폰기 스캔들》(1979), 노인과 트랜스젠더 등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처한 여성들이 모인 산부인과가 배경인 《수상한 여의사》(1983) 등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영화들이 많다. 무려 9개의 속편을 낳은 《천사의 창자》와 같은 인기 시리즈도 탄생했다. 도덕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 여성의 욕망 탐구라는 장점은 로망 포르노의 인기 요인이었다. 이후 이 시장이 사장(死藏)된 것은 1980년대 비디오 대여점을 통해 AV 시장이 확산되면서다.

 

닛카쓰 스튜디오가 로망 포르노 탄생 45주년을 기념해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 일명 ‘로포리 프로젝트’를 발표한 건 지난해 봄이다. 지난해 8월에는 도쿄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소노 시온, 나카타 히데오, 시라이시 가즈야, 유키사다 이사오, 시오타 아키히코 등 일본에서 활약하는 유명 감독 5명과 함께 로망 포르노를 제작하겠다는 소식이었다. 닛카쓰가 로망 포르노 부활의 성공적 가능성을 점친 무대는 2012년 닛카쓰 100주년 기념 상영회다. 일본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 등에서 열린 상영회는 성공리에 마무리됐고, 로망 포르노에 대한 관객의 뜨거운 반응 역시 감지됐다. 젊은 여성 관객층이 많았다는 점을 주목한 닛카쓰는 로망 포르노가 여전히 시장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라고 판단했다.

 

영화 《화이트 릴리》와 《안티 포르노》(왼쪽부터) © 홀리가든

 

여성의 욕망을 더욱 적나라하게 주목하는 새 프로젝트

 

다섯 감독은 이전에 닛카쓰 로망 포르노 연출에 참여한 적이 없다. 이 섭외 조건은 이번 로포리 프로젝트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다. 이들에게는 과거 로망 포르노의 규칙이 동일하게 주어졌다. 다섯 감독은 작품마다 하나의 키워드를 소재 삼아 일주일간 영화를 만들었다. 소노 시온은 예술을 소재로 《안티 포르노》를, 나카다 히데오는 레즈비언을 소재로 《화이트 릴리》를, 시라이시 가즈야는 사회를 소재로 《암고양이들》을 연출했다.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를 연출한 유키사다 이사오와 《바람에 젖은 여자》를 만든 시오타 아키히코는 각각 사회와 싸움이라는 소재를 택했다.

 

이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어진 일본 영화 시장에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대형 스튜디오가 장르 영화의 틀 안에서 각 작가가 고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명 남성 감독들이 여성 관객을 위한 에로티시즘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흔쾌히 참여한 것 역시 고무적이다. 특히 소노 시온의 《안티 포르노》는 주인공 쿄코(도미테 아미)를 통해 일본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소비되는 방식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로포리 프로젝트 다섯 편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얼마 전 폐막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들에게 선을 보인 뒤 오는 25일 《바람에 젖은 여자》를 시작으로 순차 개봉한다. 이 영화는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전직 극작가 고스케(나가오카 다스쿠)가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자신에게 돌진한 여성 시오리(마미야 유키)와 부딪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중년 남성의 쓸쓸한 자화상을 그린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세 여성의 유대와 그들이 살아가는 풍경을 담은 《암고양이들》, 도예가 도키코(야마구치 가오리)와 제자 하루카(아스카 린)의 위험한 관계를 주목한 《화이트 릴리》도 저마다의 개성이 또렷하다. 닛카쓰가 쏘아 올린 신호탄이 에로티시즘 영화 시장의 판도를 어떻게 뒤흔들어 놓을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부활한 이 프로젝트가 요즘 관객들에게 어떻게 평가받을지 기대가 모이는 시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