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태풍’ 맞은 검찰, ‘집단 반발’은 없었다
  • 조해수 기자 (chs900@sisajournal.com)
  • 승인 2017.05.29 11:16
  • 호수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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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盧 정권 상황 재현 가능성 제기됐지만 ‘찻잔 속 태풍’에 그쳐

 

검찰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섰다. 검찰에 대한 대규모 인적 쇄신과 제도 정비를 예고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맞서 수뇌부의 줄사표 등 집단 항명에 나설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참여정부 시절인 지난 2003년 검찰의 집단 반발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검찰이 ‘명분’을 잃었다. 대다수 국민은 검찰 개혁을 원하고 있다. 서열문화를 파괴했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항명에 나설 경우, 오히려 국민적 역풍을 맞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문재인 정부는 검찰 개혁의 고삐를 더욱 죄고 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검·경 수사권 조정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사항으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면서 제도적 정비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5월19일 서울중앙지검장에 윤석열 대전고검 검사가 파격적으로 임명되면서 검찰은 패닉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검찰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문재인 정부가) 나가도 너무 나갔다”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검찰이 발끈하는 이유는 연수원 기수를 중심으로 하는 검찰 내 고유한 서열문화 때문이다. 검찰 조직에서는 후배 기수가 승진해 상급자로 오게 되면 선배 기수들이 줄사표를 내는 관행이 있다. 윤 지검장의 하급자인 서울중앙지검 1~3차장은 모두 선배이거나 동기다. 또한 사법연수원 23기인 윤 지검장이 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47명의 검사장급 이상 고위간부들도 용퇴(勇退)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는 강력한 검찰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 연합뉴스

 

검찰 간부 “윤석열 임명은 블랙코미디” 반발

 

실제로 윤 지검장이 임명된 날 이창재 법무부 차관과 김주현 대검 차장검사가 동시에 옷을 벗었다. 이에 발맞춰 검찰 내부에서도 반발 기류가 확산됐다. 이완규 인천지검 부천지청장은 검찰 내부 전산망인 ‘이프로스’에 윤 지검장의 임명을 놓고 절차적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이 지청장은 “갑작스러운 인사인 데다가 감찰이 시작되자마자, 조사가 행해지기도 전에 직위 강등 인사가 있어 그 절차나 과정이 궁금하다”면서 “이번 인사 제청은 누가 했는지, 장관이 공석이니 대행인 차관이 했는지 의문이 든다”라고 지적했다. 이 지청장은 지난 2003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사와의 대화’에 참석했던 인물이다. 노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판사 출신인 강금실 변호사를 임명했는데, 강 장관은 김각영 검찰총장보다 11기수나 아래였다. 김 총장은 항명의 표시로 전격 사퇴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민정수석을 맡고 있었다.

 

검사와의 대화 당시 참석했던 김윤상 전 대검 감찰과장도 문재인 정부에 각을 세웠다. 김 전 과장은 5월18일 돈봉투 만찬 감찰 지시와 관련해 “노무현한테도 개기고 박근혜한테는 사표 던지고 나왔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닌 것”이라면서 “나도 현직에 있을 때 총장, 장관, 고검장, 검사장, 검찰국장, 법무실장, 차장검사, 부장검사로부터 격려금을 많이 받았다. 총칼만 안 들었지 권위주의 정부와 뭐가 다르냐. 참신한 인사와 탈권위주의 행보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치고 있었는데 점령군 행태를 벌써 보인다”고 비난했다. 김 전 과장은 지난 2013년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논란 때 “채 총장의 호위무사가 되겠다”며 사표를 제출한 바 있다.

 

윤석열 신임 서울중앙지검장이 5월22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청사로 출근하며 검사들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평검사 “돈봉투 만찬 사건은 관행 아닌 적폐”

 

그러나 평검사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반응하고 있다. 2003년의 경우 내부 통신망에 항의의 글이 잇따라 게재되고 평검사 회의, 기수별 회의도 줄을 이었다. 반면 지금 검찰 내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직 검사는 “검찰 간부들은 돈봉투 만찬 사건을 ‘관행’이라고 치부하고 있는데 부끄러울 따름이다”면서 “이번 사건은 관행이 아니라 ‘적폐(積弊)’다. 국민 모두가 검찰을 비판하고 있는데 오직 검찰 수뇌부만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개혁이고, 검찰 개혁을 하라고 국민들이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검찰은 자중하고 자숙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검찰과 수사권 재조정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경찰도 ‘검찰 때리기’에 나섰다. 경찰 수사권 독립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황운하 경찰청 수사구조개혁단 단장이 총대를 멨다. 황 단장은 5월22일 “(과거 군사정권은) 검사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대가로 정권의 충견(忠犬)으로 활용했다. (민주화 이후) 군사 독재가 물러간 자리에 검찰 독재가 들어왔다. 우리 검찰은 악마 같다”면서 “검찰이 개혁의 단두대 위에 올랐다”고 비판했다.

 

또한 경찰은 돈봉투 만찬 사건을 수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시민단체가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 등 만찬 참석자 10명을 경찰에 고발한 것과 관련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 법무부에서 (해당 사건을) 감찰하고 있으니 그와 진행 속도를 맞출지 등 협의할 필요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경찰은 개헌 과정에서 영장 청구권을 가져오는 등 수사권 독립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와대도 수사권 조정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경찰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경찰은 수사권 조정에 대한 강한 염원을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수사권 조정의 전제로 인권 친화적 경찰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경찰 자체에서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방안을 마련할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윤 지검장의 첫 출근날인 5월22일 아침, 노승권 중앙지검 1차장과 이정회 2차장, 이동열 3차장 등이 직접 정문으로 나와 윤 지검장을 맞았다. 세 차장들은 윤 지검장의 선배 또는 동기지만 윤 지검장에 대한 깍듯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새롭게 거듭날 검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검찰이 ‘정치 검찰’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을 불식시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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