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계가 때아닌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원로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 작가가 후배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서예계가 폭풍전야다. 정 작가는 2012년 복구된 숭례문 상량문을 직접 쓴 서예계 거장으로, 지난 5월12일부터 한 달간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정도준-필획과 구조’라는 이름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곳에 전시됐던 정 작가의 작품 70여 점 중 15점 이상이 표절 의혹에 휘말렸다.
서예가이자 서예평론가인 김정환 작가는 5월12일 정 작가의 개인전 개막식에 참석했다가 전시장 메인 홀에 위치한 작품《태초로부터》 시리즈 14점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2014년 작업을 시작해 2016년 9월 자신의 개인전에서 소개한 작품 《묵음(默吟)》과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6월5일 기자와 만난 김 작가는 “정 작가의 개막식에 함께 간 동료 작가도 ‘왜 자네 작품이 여기 걸려 있나’라고 할 정도였다”며 “이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표절”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김 작가가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또 있다. 지난해 김 작가가 작품 《묵음》을 소개할 당시 정 작가가 그의 개인전에 직접 찾아와 방명록에 서명하고 작품 사진이 실린 도록(圖錄)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정 작가가 개인전에 찾아온 이후 그의 작품 스타일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 작가의 작업 방식과 기법이 변할 땐 선행과정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 보여야 하는데 정 작가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도준, 10여 년 전부터 표절” 주장도 나와
김 작가는 “정 작가가 주변 사람들에게 《태초로부터》를 내 작품 《묵음》이 소개되기 훨씬 전부터 작업해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정황이나 증거도 없다. 또 예술 작품은 발표일이 곧 기준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 경기대 교수도 김 작가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박 교수는 “두 작가 작품의 형태적 유사성이 너무 크다”면서 “한지(韓紙) 전체를 먹물로 충분히 적셔 채운 후 부분만 여백을 남기는 방식은 정 작가가 이전에 발표해 온 작품들에선 보이지 않던 구도와 기법”이라고 평가했다.
표절 논란에 휩싸인 정 작가 작품은 《태초로부터》 시리즈 외에 또 있다. 그가 줄곧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아온 2006년 작품 《천지인(天地人)》 역시 후배 서예가인 외현 장세훈 작가가 2005년 세계전북서예비엔날레에서 발표한 작품 《천지인》을 그대로 베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장 작가는 “2005년 비엔날레에 정 작가도 함께 참여해 작품을 전시했기 때문에 내 《천지인》 작품을 못 봤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정 작가는 이번 예술의전당 개인전에서도 《태초로부터》와 함께 《천지인》을 전시하며 자신의 대표작으로 소개했다. 장 작가는 “10년 전엔 작품이 하나라서 그냥 덮었는데, 이번에 또다시 후배 작품을 무더기로 베껴 10여 점을 버젓이 전시한 걸 보면서 더 이상 좌시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표절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김 작가와 장 작가 모두 정도준 작가가 현재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충분히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김 작가는 인터넷에 올린 예술의전당 개인전 소개 정보에 문제의 《태초로부터》 14점 사진이 모두 빠져 있는 점에 대해 “표절 논란을 예상한 의도적 전략”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장 작가는 “정 작가가 지인들이 전시를 보러 오면 표절 의혹이 있는 작품 앞에 데려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한 작품이라며 해명 식의 설명을 해 준다고 한다”며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이라고 주장했다. 박영택 교수는 “정 작가가 이전에 (후배 작가들) 작품을 봤다면 자신의 작업 과정에서 논란이 될 만한 유사성을 피했어야 하는데 되레 더 노골적으로 따라 했다”며 비판했다.
서예계 “아는 사람 다 안다” 공동행동 나설 듯
이 같은 표절 의혹에 대해 서예계에선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표절 의혹은 언젠가 터질 ‘시한폭탄’ 같은 것”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서예가 30여 명이 모인 인터넷 단체채팅창에도 매일같이 정 작가와 관련한 표절 얘기들이 활발히 오가고 있다. 정 작가의 표절 의혹을 제기한 블로그 글에도 “딱 봐도 한 사람 작품 같다” “전시를 기획한 사람도 문제다” “충격이다.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등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는 네티즌들의 댓글이 달려 있다. 표절 피해를 주장하는 김 작가와 장 작가 모두 “이미 정 작가의 제자들조차 파문이 커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며 “더 이상 쉬쉬할 게 아니라 오래 곪아 있던 문제를 터트리고 고쳐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현재 피해 작가들을 비롯해 표절 의혹에 공감하는 서예계 작가들은 오는 6월28일부터 경남 진주에서 열릴 예정인 정 작가 전시회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들은 만일 정 작가가 표절 논란에도 불구하고 예술의전당 개인전 그대로 진주에서도 전시회를 연다면 즉각 성명을 발표하는 등 공동행동에 나설 계획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정도준 작가는 표절 의혹을 부인했다. 정 작가는 6월8일 “20여 년 전부터 한글 자음을 가지고 계속 작업했으며 3~4년 전부터는 정형화된 틀에서 부(不)정형화된 형태로 자음 표현을 바꿔나갔다. 자연스러운 변화 과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태초로부터》와 김정환 작가의 《묵음》 간의 유사성에 대해 “나는 문자·기호를 표현한 거고 김 작가는 면(面)을 칠해 그림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먹을 많이 써서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서예가가 먹을 많이 쓰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덧붙였다.
또한 작품을 내놓은 시기 문제에 대해선 “작품 발표는 내가 마음에서 준비되고 용납됐을 때 하는 것이라 생각해 묵혀둬 왔다”며 “70년 평생 글씨 하나만 갖고 살아온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하고 매도하는 게 안타깝다”고 밝혔다.
특히 정 작가는 장세훈 작가 작품 표절 의혹에 대해선 “2005년 장 작가 작품보다 2년 앞선 2003년 독일 전시회에 출품했던 내 작품과 장 작가 작품이 비슷해 보인다”며 표절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당시 독일 전시회 도록을 기자에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