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가 좌파 가치 지켜내지 못할 때 패배”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6.16 16:41
  • 호수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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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 총선 참패로 정치생명 유지 미지수

 

‘마사크르(Massacre·대살육)’. 프랑스 언론이 6월11일 치러진 2017년 프랑스 하원의원 총선거 1차 투표 결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과격한 표현을 서슴없이 쓰는 이유는 프랑스 지도에 그려진 선거 결과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그동안 우파를 상징하는 푸른색과 좌파를 상징하는 붉은색이 프랑스를 양분해 왔던 것과 달리 이번엔 대륙 전역이 보라색으로 뒤덮였다. 보라색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정당 ‘앙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를 상징하는 색이다.

 

애초에 이번 선거는 대선과 약 한 달의 시차를 두고 치러졌다는 점에서 대통령 정당 앙마르슈에 유리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기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48.8%라는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선거에서 앙마르슈는 좌우를 동시에 잠식하며 프랑스 정치사를 새로 쓰게 됐다.

 

현행 정치 시스템이 만들어진 5공화국에서 좌우가 아닌 중도우파가 과반 의석을 차지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기세로는 앙마르슈가 최종적으로 전체 하원 의석 577석의 70% 선인 425석 이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점쳐진다. 지금보다 다소 기세가 꺾인다고 해도 최소 355석까지 내다볼 수 있어, 과반은 이미 안정적으로 확보됐다고 볼 수 있다. 즉 반대파의 제동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입법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랑스 총선 1차 투표가 치러진 6월11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프랑스 북부 도시 르투케의 한 투표소에서 투표한 뒤 투표 관계자를 격려하고 있다. © EPA 연합

 

“마크롱은 막아내기 힘든 파도였다”

 

앙마르슈의 이러한 압승에 버금가는 또 다른 이변은 바로 사회당의 몰락이었다. 프랑스 5공화국 사상 최장기 집권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을 배출했던 사회당이 60년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277석을 차지해 제1정당이었던 사회당은 이번 1차 투표에서 고작 9.5%의 지지율에 그치고 말았다. 6월18일로 예정된 2차 결선 투표에서 선전(善戰)을 한다 해도 최대 의석은 40석 안팎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회당은 전통적인 강세 지역에서조차 기반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회당 텃밭이던 프랑스 북부 칼레 지역에서조차 결선에 진출한 사회당 후보는 한 명도 없었다.

 

무엇보다 뼈아픈 건 전직 장·차관 등 당의 유력 인사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는 사실이다. 지난 올랑드 내각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낸 오렐리 필리페티는 이번 선거에서 낙마한 대표적인 사회당 중진이다.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는 자리에서 이번 중도우파의 돌풍을 두고 “막아내기 힘든 파도였다”고 실토했다. 그러면서 “좌파가 좌파적 가치를 지켜내지 못할 때 이처럼 패배하는 것”이라며 “(마크롱 정부의) 노동 개혁과 사회보장제도 개선에 대한 방향을 보면 대단히 걱정스럽다. 실패할 것을 대비해 좌파는 언제나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대로 좌파나 사회당이 그때까지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미지수다.

 

2012년만 해도 행정권과 상·하원, 지방의회까지 모두 휩쓸었던 사회당이 불과 5년 새 눈에 띄게 몰락하면서 당 내부적으로 심각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회당은 그간 좌파적 노선을 유지하지 않고 우(右)클릭 일변도의 정책으로 나아가면서 기존의 좌파 지지층까지 잃게 됐다고 분석한다.

 

이변의 연속이자 사실상 ‘마크롱의 승리’라고 정의할 수 있는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프랑스 내부엔 기대와 우려가 혼재하고 있다. 에릭 데샤반 소르본대 철학과 교수는 이번 총선 결과와 마크롱 정부의 미래에 대해 “마크롱 정부가 거머쥔 전대미문의 행운은 기존 정당을 무너뜨리고 과반이 넘는 의회 권력을 한 손에 쥐었다는 것이 아니다”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진짜 그가 쥔 행운” 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현대 정치사 전문가인 장 가리그 오를레앙대학 교수는 “16% 지지를 받은 세력이 의회의 70%를 장악하게 됐다”며 정당의 대표성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실제 이번 선거에서 앙마르슈는 정당 득표율 32.2%를 기록했지만 전체 투표율이 50%에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전체 유권자의 16%만 지지를 얻은 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에두아르 위송은 “마크롱의 성공요인은 그의 정책·공약이 아니라, 기존 정치인들과 다르게 ‘투명한 소통’을 주장해 차별화에 성공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1974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이후 40년 넘게 중도 출신 대통령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가 새롭게 느껴질 뿐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트럼프를 만나 당당히 악수하고 IT(정보기술)업체를 방문하는 행보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중도 신당 앙마르슈 파리 본부에서 당 관계자들이 총선 1차 투표 결과를 확인한 후 환호하고 있다. © EPA 연합

 

마크롱, 左右 아우르는 개혁 성공시킬까

 

현재 마크롱이 내걸고 있는 정책 방향은 단순히 좌파, 우파로 구분 짓기가 어렵다. 프랑스에선 종종 우스갯소리로 “심장은 왼쪽, 지갑은 오른쪽”이라는 말을 한다. 심장이 왼쪽이라는 건 단순히 해부학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이 심정적으로 좌파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왕의 목을 벤 혁명의 역사가 잠재돼 있는 탓이다. 그러나 지갑, 즉 경제 문제에 있어선 반대로 우파적 성향을 가진 국민들이 많다. 시장 친화적인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공감이 강한 것이다.

 

이번 마크롱 정부는 복지 부분에 있어 좌파적 색깔을 띠면서도 경제정책은 우파적으로 채워져 있어 좌파나 우파 사이에서 고민하던 지지층을 손쉽게 끌어당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크롱 정부가 과연 임기를 다하는 순간까지 좌우를 아우르는 개혁을 약속대로 성공시킬 수 있을까. 이번 선거의 압승으로 마크롱 정부는 일단 장애물 없는 고속도로 앞에 서게 됐다. 이처럼 유리하게 짜인 정치적 환경을 바탕으로, 과연 좌우 통합에 숱한 실패를 거듭했던 이전 정권과 차별화를 이뤄낼 수 있을지, 마크롱 정부의 시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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